‘치하포 사건’이 발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과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의 조선정부와 일본정부 각 인물들의 역할과 영향력 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사진출처=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사진출처=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한국강사신문 김지영 기자] 저자 이봉재의『백범 김구와 치하포사건(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2022.07.27.)』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치하포사건’이다. ‘치하포사건’은 김구 선생이 1896년 3월 9일 새벽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의 한 여점에서 칼을 차고 변복들 한 채 조선사람 행세를 하는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를 “국가와 민족에 해를 끼치는 독균 같은 존재가 명백하다.”고 판단하고, ‘국모보수’란 대의명분으로 살해한 사건이다.

김구 선생은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도 임시정부를 유지하여 국가의 정기를 이어나감으로써 암흑기에 국민들에게 자존감과 희망을 주었으며, 독립과 통일된 조국을 위해 일평생 헌신했던 인물이다.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운동’이나 3·1운동 당시 ‘무저항·무폭력’을 지향하던 방식과는 다른 일제의 침탈에 힘으로 맞섰고, 일제를 이 땅에서 물리치고자 ‘물리적 방법’ 등 모든 수단을 강구하였다.

이러한 김구 선생이 21세란 어린 나이에 실행한 ‘치하포사건’ 하나로 김구 선생의 모든 것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치하포사건’에 대하여 대중들은 많은 관심들을 갖고 있고, 정작 김구 선생도 이에 대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었다. 특히 2017년 ‘치하포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 ‘대장 김창수’가 방영됨으로써 더욱 대중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치하포사건’에 대하여는 여러 평가가 있다. 그러나 어떠한 평가를 하든 이에 앞서 꼭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치하포 사건’이 발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과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의 조선정부와 일본정부 각 인물들의 역할과 영향력 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또한 ‘치하포’라는 일개 시골에서 발생한 일본인 살해사건이 조선과 일본의 핵심 수뇌부들이 모두 나서는 등 조선과 일본을 뒤흔든 사건이 되었는지 실상을 보아야 한다.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사실들에만 주목하여서는 ‘치하포사건’의 진실을 알기 어렵다.

아울러 김구 선생이 인천 등 각지의 수많은 대중들로부터 응원을 받았음에도 끝내 ‘강도범’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와 ‘강도범’으로 몰아갔던 자들이 누구인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치하포사건’ 발생 후 일백이십여 년이 흐른 현재, 당시 고무라 공사와 매국노 이완용이 주장한 그대로 김구 선생을 파렴치한 강도범으로 몰아가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부디 이 저서가 ‘치하포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저자 이봉재는 정보통신사료 수집 및 연구가. 강원도 춘천 거주. 이십여 년 간 정보통신기기와 통신 관련 사료의 수집과 이와 관련된 통신역사 정립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정보통신역사 관련 학술활동으로는 2017년 12월 28일에 ‘한국어정보학회’에서 개최한 ‘한국어정보학회총회 및 남북국제대회준비동계학술대회’에서 「전화기의 옛 명칭, 어화통·덕률풍·전어기」를 주제로 발표하였고, 2018년 1월 17일에는 ‘한국통신학회’에서 개최한 ‘동계종합학술발표회’에서 「우리나라 최초 전화 개통일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발표하였다.

특히 2019년 2월에는 근대통신을 주제로 한 『문헌에 따른 근대통신 (우체·전신·전화) 역사』를 집필하여 출간하였고, 이 책은 2019년 11월 세종도서 ‘학술부문’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문헌에 따른 근대통신(우체·전신·전화) 역사』를 집필할 당시 『백범 일지』의 고종과 인천감리 사이에 최초로 전화통화가 있었다는 기록 의 신뢰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전화통화의 계기가 된 ‘치하포사건’ 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치하포사건’에 대하여 잘못 알려진 사실들이 많음을 발견하고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소명 의식에 『백범김구와 치하포 사건』을 집필하게 되었다. 본 저서가 ‘치하포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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