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을 이기는 리더십②

먼저 들어온 사람이 먼저 나간다

[한국강사신문 윤상모 칼럼니스트] 베트남 전쟁이 한참이던 1967년 10월 26일 미국 해군 소속 전투기 10대가 하노이 중심부에 대한 폭격 명령을 받고 출격했다. 그 중 한 대가 북베트남의 소련제 미사일을 맞고 추락했다. 조종사는 두 팔과 다리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고도 탈출에 성공했지만 하노이 북부의 쭉박 호수에 떨어져 의식을 잃었다. 하노이시 군인과 민간인들에 의해 구조된 미 해군 조종사는 하노이의 호아로 감옥에 수용된다. 조종사는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북베트남군의 모진 고문을 견디던 중 석방 제안을 받는다. 해군 제독이었던 조종사의 아버지가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되자 외부 선전 목적으로 조기 석방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조종사는 ‘먼저 들어온 사람이 먼저 나간다’는 군인 수칙을 언급하며 먼저 잡힌 포로들이 모두 석방될 때까지 나갈 수 없다며 석방 제안을 거절한다. 그 조종사는 1973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5년 반 동안의 포로 생활 끝에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도 조종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동안 머리 위로는 팔을 들어 올릴 수 없게 된다.

조종사가 석방을 거부하던 시기 미국 국방부는 베트남 전쟁을 조기에 끝낼 목적으로 그 조종사의 아버지인 태평양함대 사령관에게 하노이를 집중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당시의 폭격기는 조준 능력이 정확하지 않아 목표 지점 근처의 미군 포로 수용소에도 폭탄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사령관은 고심 끝에 폭격 명령을 내린다. 그 조종사는 회고록에 자기가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자신 또한 아버지와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종사는 제대 후 정계에 진출해 하원의원 2선, 상원의원이 되어서는 6선을 연임했으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기도 했다. ‘미국의 자존심’으로 불리던 그 조종사의 이름은 지난 8월 25일 81세를 일기로 사망한 존 매케인이다.

1973년 생환한 매케인이 닉슨 대통령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사진=한국일보>

십자군의 선봉엔 늘 왕족이나 귀족 출신의 장군이 있었다

유럽의 귀족들은 전쟁터에 나가 장렬히 전사하는 것을 가문을 빛내는 영광으로 여겼다. 이러한 전통은 유럽 역사를 만든 로마시대 때부터 시작되어 십자군 전쟁 때에도 이어졌다. 십자군의 선봉엔 늘 왕족이나 귀족 출신의 장군이 있었다. 유럽의 귀족들 간에는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조상이 있느냐’의 여부로 명문 귀족으로 대접했다. 영국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귀족 가문의 장교들은 식민지에서의 내전과 1차 대전을 치르면서 수 없이 전사했다. 윈스턴 처칠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 150명 중에서 1차 대전 후 살아남은 사람은 처칠을 포함해 4명에 불과했다.

십자군전쟁 <사진=위키백과>

영국 정부과 왕실은 끝까지 국민과 함께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독일군에 점령되었고 프랑스마저 개전 한달 만에 독일에 항복했다. 런던에 대한 독일 공군의 폭격이 시작되고 폭격은 40여 일간이나 지속되었다. 정부 고위 인사들은 독일과의 전쟁은 승산이 없다며 영국 정부를 캐나다로 옮기자고 수상인 처칠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처칠은 정부가 캐나다로 옮기면 영국 국민들은 누구를 믿고 전쟁에 임하겠냐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독일의 폭격으로 영국의 민간인 4만 여명이 사망했고 수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다. 런던 시민들은 지하철역이나 지하 방공호 안에서 생활하며 독일의 침공을 막아낸 유일한 유럽 국가가 되었다. <사진=중앙일보>

영국 왕실의 심장인 버킹엄 궁도 2차 대전 때 독일의 폭격을 피해가진 못했다. 국왕이던 조지 6세는 독일군의 폭격으로 왕실 가족들과 네 번이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겨가며 끝까지 국민과 함께 했다. 조지 6세는 전쟁의 공포에 떨고 있던 국민들에게 영국인으로서의 자존감을 일깨우는 명연설을 한다. 지독한 말더듬이를 극복하고 영연방 국민들과 전쟁터의 장병들에게 한 줄 한 줄 연설문을 읽어 내려가는 조지 6세의 모습은 영화 「킹스 스피치(King’s speech)」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영국이 2년에 걸친 독일 공군의 폭격을 견디며 저항하자 독일은 영국 점령계획을 포기했다.

리더들의 솔선수범 정신

제2차 세계대전 중 처칠의 부인과 자녀들 그리고 루즈벨트 대통령의 네 명의 아들 모두 전쟁의 현장에 있었다. 처칠의 부인 클레멘타인 처칠은 폭격으로 가족이나 집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자선활동을 했다. 하급 장교들의 아내 혹은 여군들을 돕는 일도 했다. 처칠의 유일한 아들 랜돌프는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군에 복무 중이었다. 랜돌프는 전쟁이 시작된 직후 아버지가 복무하던 이집트의 제4경기병단에 배치되었지만 얼마 후 특수 부대인 공수특전단에 자원했다. 그 당시 랜돌프는 아내와 어린 아들이 있었다. 랜돌프 처칠은 한국전쟁 때 영국군 소속의 종군 기자로도 참전했다. 종군 기자는 언제나 최전방에서 전쟁의 실상을 취재한다. 따라서, 목숨을 담보로 취재를 한다. 한국전쟁 기간 중 영국의 타임지와 데일리 텔레그라프 기자 17명이 사망했다. 랜돌프 역시 낙동강 전투를 취재하던 중 부상을 입었다. 랜돌프는 아버지 윈스턴 처칠이 군에서 장교와 종군기자로 복무했던 발자취 그대로 처칠 가문의 길을 자원해서 걸어갔다.

윈스턴 처칠 수상의 아들 랜돌프 처칠은 영국군 소속 종군기자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1950년 8월 낙동강 왜관 부근 다부동에서 임인식 종군사진대장(왼쪽)과 랜돌프 처칠이 함께 찍은 사진 <사진=한겨레신문>

처칠의 세 명의 딸들, 다이애나와 사라, 메리도 2차대전 기간에 군복무를 했다. 장녀 다이애나는 어린 아이가 있었지만 독일 항공기의 영국 폭격을 감시하는 공습감시원에 자원했다. 사라는 공군 여성지원단에 들어가 공습 피해 상황을 파악했고 독일군 로켓발사대 등의 위치를 확인하는 항공사진 판독을 담당했다. 메리는 여군으로 자원입대해서 대공 포대 장교로 진급했다. 독일이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던 V1 로켓을 방어하는 영국 남부 지역에서 복무하였고 벨기에 소속 부대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복무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네 아들, 제임스와 엘리엇, 존, 플랭클린 2세 모두 직접 전쟁에 참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후 세계 질서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기본 방침이 되는 대서양 헌장(Atlantic Charter)에 서명하기 위해 만난 루즈벨트와 처칠 <사진=US Embassy in Korea>

이러한 영국 귀족의 솔선수범 정신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왕위 계승서열 6위인 해리 왕자는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했다. 전쟁이 한창 벌어지던 아프가니스탄에는 두 차례 파병을 갔었는데 탈레반으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군에서 10년간 복무하는 동안 일반 장교들과 똑같이 생활했고 아파치헬기 사수겸 조종사 자격도 가지고 있다.

현역 장교로 10년간 복무 후 제대한 해리왕자. 탈레반과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두 차례 파병을 갔다. <사진=티스토리>

한국 역사 속의 리더들이 보여준 리더십의 교훈

우리의 리더들은 어땠을까? 조선의 임금들은 전쟁이 나면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명나라까지 가려다가 명이 국경을 넘는 것을 거부해 의주에서 피난 행렬을 멈추었다. 인조는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피난 갔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서 항복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왕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그 결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俄館播遷) 1년 동안 열강들의 대한제국 침탈은 가속화 되었다.

1896년 고종이 피신한 러시아공사관 <사진=한겨레신문>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대전으로 피신한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오 방송으로 ‘정부는 북한군을 곧 격퇴할테니 피난 가지 말고 안심하라’고 말한 다음 부산으로 정부를 옮겼다.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방송을 믿은 상당수의 서울 시민들은 한강 철교의 폭파로 발이 묶였고 일부는 북한군의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전쟁 후에는 북한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처벌당했다.

한국전쟁 3일 만에 폭파된 한강 인도교 <사진=노컷뉴스>

지금도 우리나라의 지도자급 인사들과 그 자녀들은 군에 갈 나이만 되면 이상하리만치 군대에 들어갈 수 없는 체질이거나 건강이 좋지 않다. 모 대통령 시절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발생했다.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위해 안보, 외교, 통일 등 관련된 장관들을 불러 모았다. 북한의 미사일에 대한 대책과 우리 군의 대비 태세를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모인 사람들 중에서 군대에 다녀온 사람은 국방부 장관 한 명뿐이었다’는 칼럼이 신문 한 쪽에 조그맣게 실려있었다.

리더의 역할은 자신의 의도대로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역할이다. 리더가 어렵고 힘든 일에 먼저 나서는 모습을 보일 때 사람들은 그 리더를 존경하고 따르기 마련이다. 과학자인 아인슈타인마저도 이렇게 말했다.

“리더십이란 본보기 그 자체다”

 

※ 참고자료 : 「리더라면 처칠처럼」 플래닛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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