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강사신문 김재은 칼럼니스트] 나이가 들어서인가. 눈이 전보다 침침해지고 청력도 날이 갈수록 희미해지는 것 같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앓아온 중이염 탓에 오른쪽 귀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소란스러운 자리에서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다. 세상의 소음은 빼고 진짜 소리를 듣는 데는 한쪽 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스스로 위로하지만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렸을 때 병으로 시각과 청각을 잃었지만 정신적, 지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뤄 낸 의지의 인물인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눈이 좋지 않으면 사물과 멀어지지만 귀가 좋지 않으면 사람으로부터 멀어진다’고.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삶을 즐겨 해서 한쪽 귀만으로도 사람들과 잘 지내며 살아가고 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생물학에 ‘역치(閾値)’ 라는 게 있다. 생물이 외부환경의 변화, 즉 자극에 대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를 말한다. 소머즈가 아니라면 멀리 있는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우리가 들을 수 없는 것은 귀가 반응할 수 있는 역치 이하의 자극이라서 그런 것이다. 또한 가시광선보다 길거나 짧은 파장의 적외선이나 자외선을 눈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소리나 빛 등 모든 자극을 다 수용할 수 없다 하여 슬퍼하거나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아마 더 힘들고 혼란스러워 일상의 삶을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받아들이면 그 뿐. 여기서 자연스럽게 과유불급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역치의 법칙은 운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근육운동을 위해 덤벨을 들 때도 역치 이상의 무게를 들어줘야 근력이 늘어난다. 가벼운 덤벨을 10회 드는 것이 무거운 덤벨 1회 드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이다. 횟수나 시간도 마찬가지인데 이때도 역치 이상의 운동을 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니 평일에는 그냥 지내다가 주말에 등산 등을 몰아서 했다고 자랑해선 곤란하다. 이 경우에는 오히려 부상등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운동 효과를 얻으려면 일상의 삶에서 습관처럼 꾸준히, 규칙적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 같은 크기의 자극을 지속적으로 받으면 역치가 올라가 나중엔 더 큰 자극을 주어야 자극을 느낄 수 있다. 이를 ‘감각의 순응’이라고 한다. 고향의 어머니가 해 주시는 음식이 날이 갈수록 짠 것도 이런 예이다.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 어머니의 혀가 느끼는 짠맛의 역치가 높아진 것이다. 어머니의 음식이 짠 만큼 어머니가 가족들에게 그만큼 긴 세월 음식을 준비해 온 것이기에 음식이 ‘짠’만큼 그만큼의 사랑이 깃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진다.

관련하여 한 마디 덧붙이면 ‘쾌락적응’이라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돈이 많고, 크고 화려한 집에 사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거기에 적응하게 된다. 처음에 느꼈던 그 기분이 나중엔 희미해지며 더 큰 욕심을 내게 된다. 그래야만 역치이상의 자극이 되어 그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역치란 생물학적 본능이자 이치인 것이다. 어쩌면 삶의 원리, 세상살이의 원리인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역치가 높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역치는 잘 관리해가면 좋겠다.

욕심을 키워가는 삶 대신 나름의 정도에서 충분함을 느끼고 여기서 만족을 얻는 삶이 바로 그것이다. 최인호 소설의 ‘상도(商道)’에 등장하는 ‘계영배(戒盈盃)’도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나저나 갈수록 희미해지는 청력에 보청기의 도움을 받아 소리의 역치를 제공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그래야 내 삶의 최고 무기인 ‘진심어린 경청’이 가능할 것 같기에.

※ 출처 : 교차로 신문 ‘아름다운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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