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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강사신문 도영태 칼럼니스트] 어느 운송업체가 북해에서 잡은 청어를 산채로 런던으로 운송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대부분의 청어가 운송도중 죽어 신선도가 떨어지므로 산채로 운송을 해야 제값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운송업체로써는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업체는 결과적으로 역발상 아이디어를 통해 산채로 청어를 운반,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그 비결은 바로 청어에게 절박감을 부여한 상황설정에 있었다. 청어를 운반하는 용기에 메기 두 마리를 넣은 것이었다. 청어를 잡아먹으려는 메기를 피해 기를 쓰고 도망 다닌 청어들은 목적지까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메기가 잡은 먹은 고기는 고작 두 마리에 불과했다.

이 유명한 ‘메기이론’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적절한 절박감이 없는 편안함은 오히려 느슨해지고 나태해져서 경쟁력을 잃어버린다. 모든 일에서의 성취동기 또한 어느 정도의 절박감에서 나올 수 있다.

주변에 경쟁업체 없는 음식점이 있다고 하자. 맛과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갖추었고 더구나 경쟁구도가 없어서 장사가 잘 될 것 같지만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다. 경쟁의식이 없어 갈수록 절박감이 없어지고 감각이 무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먹자골목’, ‘공구상가’, ‘휴대폰 거리’ 등도 바로 절박감을 바탕으로 서로를 경쟁자삼아 살아남는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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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도 마찬가지다. 선의의 경쟁자가 많고 심하지 않을 정도로 나를 압박하는 절박함이 있어야 더 좋은 성과를 내는 법이다. 그 절박감이 더욱 열심히 하도록 자신을 채찍질하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 성공한 사람들도 가만히 살펴보면 절박한 상황에서 의연하게 이를 대처하여 결국 우뚝 선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축구경기에서도 안정된 상황 속에서 올라온 선수들 보다 경기에서 지면 메달 권에서 멀어지고, 본선티켓을 타지 못한다는 절박감이 오히려 선수들을 더 분발하게 만든다. ‘배수지진(背水之陣)’도 어쩌면 인위적인 절박감의 연출을 통해 전의(戰意)를 북돋우려는 처사였으리라

물론, 아무런 절박함이 없이 자연스럽고 편하게 갈수 있으면 좋은 것이 아니냐며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여유 있는 청어의 삶을 그대로 보장해 주지 않는다. 절박감이 전혀 없으면 필요한 긴장감이 사라져 매너리즘에 빠진다. 스스로 변화하고 탄력성 회복을 하려는 감각 또한 무뎌진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부문이 절박성 제로의 삶이다. 그렇다고 그 절박성의 수위가 생계를 위협하고,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정도의 절박감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치고 올라갈 동력이 생기는 것이지, 아무리 노력해도 절박한 현실에서 탈피할 수 없는 구조라면 그 절박은 좌절이 된다.

어느 정도의 절박감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또한 즐기도록 하자. 그리고 나 자신에게 절박한 상황을 부여하도록 하자. 여유 있고 안정된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오래갈 수 없다. 지금의 안일함이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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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박감의 상실은 위기대응 능력도 떨어진다. 부모의 온실 속에서 아무런 절박감 없이 성장한 아이가 사회인으로서의 적응능력이 떨어진다는 통계 결과는 이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우리 자신이 청어라면 위협을 가하는 메기가 존재해야 한다. 급변하는 시장환경, 목표달성에 대한 압박감, 사업이나 취업실패에 대한 두려움, 만만치 않은 경쟁자들, 이직이나 명퇴의 위협 등이 모두 메기다. 우리는 이러한 메기의 절박감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슬기롭고 민첩한 청어가 되어야 한다.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바로 더 배고픈 놈이 이긴다고 한다. 뛰는 놈, 나는 놈 위에 절박한 놈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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