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pixabay>

[한국강사신문 이은숙 칼럼니스트] 저는 아날로그적인 사람입니다.

흐린 저녁 무렵, 느리게 기우는 달빛을 하염없이 바라봐도 지치지 않습니다. 플라타너스의 큼지막한 잎 새 사이로 후두둑 떨어지는 가는 가을비를 바라보며 그 빗속에 잠시나마 흠뻑 제 자신을 내어줄 줄도 압니다.

간질이듯 뺨을 타 흐르는 가을비는 소싯적 동심의 한 귀퉁이를 지나가게도 하고, 벼 이삭 익어가는 시골 들녘의 달디 단 바람결을 떠올리게도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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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의 한낮 열기와 초가을의 선선한 저녁바람이 아귀다툼을 하며 한동안 누구의 자리도 아닌 듯 계절이 중첩되어 저물어 갈 때마다, 코스모스의 한들거리는 꽃잎위로 첫사랑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리 나이가 들어도 아련하고 풋풋한 그날의 연정이 새록새록 흩어지는 것은, 끝내 가 닿지 못했던 미숙한 연정으로 남았기 때문이겠지요. 귀뚜라미가 담장 밑에서 밀어를 속삭일 때, 처량 맞은 보름달은 수줍은 제 얼굴이 붉어지는 것까지 들키게 만들어놓고 그저 시치미만 떼고 있었지요. 두근거리는 제 심장의 떨림을 듣고도 못 듣는 척 능청을 떨고 있었지요.

한 박자 여유로운 때가 오면 문득, 어린 시절 숲길에서 이국적인 풍경과 조우하던 날을 떠올리고는 합니다. 순백의 수피가 눈부신 자작나무숲길 앞에서 심장의 박동이 멈출 듯 이어질 듯, 전율을 느끼며 붙박이로 서 있었던 그 어린 날, 나무들 사이로 파란 하늘을 보며 가슴이 터질 듯 했던 숨 막힘이 되살아나는 짜릿함을 되뇌게 됩니다. 가을이 되니 이 마음도 다시금 오래전 기억을 더듬으며 점점 더 느려지고, 지긋해지며, 애잔하고, 하염없어지는 기쁨에 빠지게 되나 봅니다.

가난한 시골의 흙내를 여전히 기억하며 초고층의 빌딩숲속 울타리 없는 경계 안에서, 도시의 빠른 시간 속을 부유하며 오늘도 어색하게 웃다가 잠이 듭니다.

마음 속 깊은 오솔길을 따라 가는 제대로의 쉼을 약속받지도 못한 채 그렇게 또 하루를 보냅니다. 도심의 가을! 그래도 노란 은행잎의 향수가 남아있고, 찬바람이 골목을 휘몰아치며 붉은 단풍의 익은 냄새를 흩뿌리고 가더라도 언제나 마음속의 아날로그적인 향수를 기억하며, 끝을 알 수 없는 기쁨에 빠져봅니다. 손으로 일구는 잡일의 기쁨에 스스로 만족하며, 느리게 가는 것에 답답해하지 않고, 천천히 스며드는 감정에 그저 충실히 빠져드는 저의 지긋한 게으름과 안일함이 또 저는 그렇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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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시 눈을 감아 봅니다. 큰 숨으로 가을을 마셔봅니다. 한조각의 흰 구름이 걸려 들어와 마음을 들쑤셔도, 보라색 벌개미취의 달큼한 꽃 내가 날아 들어와 가슴을 휘저어도, 평온한 마음으로 그저 또 오늘의 잔잔한 기쁨과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지금의 시간을 살포시 껴안아 봅니다. 오늘은 그리운 이를 꺼내어, 손 편지를 적어봐야겠어요. 시작되는 가을에 대한 예의니까요.

이은숙 칼럼니스트는 대학에서 문헌정보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초등학교 사서이자 작가로 활동 중이다.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일상에세이를 착실하게 써나가고 있으며, 한국강사신문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수상경력으로 다산책방에서 공모한 ‘나라사랑愛독후감대회’ 장려상이 있으며, 저서로는 <내가 나를 안아주고 싶은 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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