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pixabay>

[한국강사신문 김재은 칼럼니스트] 겨울의 문턱에서 떠오르는 게 참 많다. 우선 어릴 적 고향집의 따뜻한 아랫목이다. 그 다음에 눈 내린 산사 추녀 끝에 매달린 고드름, 마을 어귀 장작불을 지펴 굽는 고구마 아저씨가 그 뒤를 잇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제 만나기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니 언제부터인가 우리 스스로 내쫓아낸 것들인지도 모른다. 서로의 정을 나누며 서로 아끼고 도와가며 살아가는 우리네 문화가 사라진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아등바등하며 얻으려 한 돈이 전보다 훨씬 많은데도 말이다.

<사진=백범 김구>

백범 선생의 ‘우리의 소원’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 원하지 가장 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중략)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백범 선생이 이 말을 한 때가 혼란스러운 해방공간기인 1947년 무렵이다. 어쩌면 선생은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염려하여 이 말을 했던 것 같다. 마음 아프게도 우리는 선생의 염려대로 고도의 압축성장 끝에 따뜻한 문화대신 돈을 선택했고, 그 후유증을 아직까지 심하게 앓고 있다.

아니 언제 회복될지 모르는 채로 중독증은 더 심해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경제는 '존재의 문제'지만 문화는 '어떻게 존재하느냐'의 문제다. 다시 말해 경제는 생존의 문제지만 문화는 삶의 질의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문화는 삶의 질을 다루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다.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방치되고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삶의 질을 다루는 문화는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최종적 담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고난 불행을 딛고 성공한 헬렌 켈러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다. "앞을 볼 수 없는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헬렌 켈러는 이렇게 답했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보다 더 불행한 자는, 눈으로 앞은 보지만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이지요." 생물학적인 시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긴 안목이다. 그 안목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문화이다. 문화야말로 창의적 통찰과 진정한 삶의 즐거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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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땀을 흘리며 경제활동을 하는 이유는 결국 문화의 향유를 위한 것이다. 문화예술 활동은 물론 여행문화, 나눔 봉사 문화 등 나열하자면 문화의 영역은 끝이 없다.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내가 하고 싶은 취미활동도 당연히 그 안에 있다. 정리해보면 우리 삶의 목적은 어쩌면 행복이 아닌 문화의 향유에 있는지도 모른다. 행복은 그 부산물에 불과하고.

저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의 미래는 여가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여가야말로 인간이 문화적인 삶을 즐기고 누리는 시간이 아니던가. 여기에서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맹자에 나오는 무항산(無恒産) 무항심(無恒心)이다.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 이치 그대로 문화예술인중엔 배가 고파 힘들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문화예술에 대한 배려와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문화는 우리의 삶의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이고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 출처 : 교차로 신문 ‘아름다운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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