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네이버 책 '타인의 고통'>

[한국강사신문 김장욱 기자] “오늘날 타인의 고통을 염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타인의 고통』은 “사진 이미지를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전쟁을 다룬 책”이다. 그건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첫 번째로 현대전은 무기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대규모로 고통을 양산하는 원인이 됐기 때문이다(포토저널리즘이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0년대 초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이것이다). 즉, 전쟁이야말로 타인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무대인 것이다. 그래서 손택은 이렇게 말한다. “사진 없는 전쟁, 즉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타인의 고통』은 9.11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을 비롯해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 전후의 현실 정세에 대한 ‘지적’ 개입이기 때문이다. 손택은 부시 행정부가 주도하는 ‘테러리즘과의 전쟁’이 ‘공허한 은유’에 불과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정부가 암이나 빈곤이나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다면 그것은 곧 정부가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협력을 요청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지만, 언제쯤 끝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전쟁인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선포한다면 “그것은 정부가 자기 맘대로 아무런 일이나 할 수 있도록 직접 자신을 허가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라크 전쟁 종전 후의 현실은 손택의 염려대로 미국이 ‘제국화’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지난 2003년 10월 12일 독일출판협회는 제55회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수전 손택에게 평화상을 수여했다. “거짓 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는 것이 시상 이유였다. 독일출판협회가 잘 지적했듯이, 손택은 첫 저서 <해석에 반대한다>(1966)에서부터 최근작 <강조해야 할 것>(2002)에 이르기까지 기계로 대량 복제되는 이미지가 한 문화의 감수성을 어떻게 바꿔놓는지 다양한 방식으로 일관되게 추적해 왔다. 

손택의 관찰에 따르면, 오늘날의 현대 사회는 사방팔방이 폭력이나 잔혹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여 있다. 특히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컴퓨터, PDA 등의 작은 화면 앞에 붙박인 채로도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재앙의 이미지를 속속들이 볼 수 있게 해줬다. 그렇지만 이 말이 곧 “타인들의 괴로움을 생각해볼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이 두드러질 만큼 더 커졌다는 말은 아니다.” 이미지 과잉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린다. 그리고 이렇듯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는 것이 손택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손택은 우리에게 이런 제안을 던진다. 무엇보다 먼저 이 세계를 거짓된 이미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자고, 제 아무리 이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제스처가 엿보일지라도 세계를 재현하는 이미지의 방식 자체를 문제삼아 보자고. 따라서, 자신이 예전에 ‘투명성 Transparency’이라고 불렀던(해석에 반대한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손택은 우리가 이미지를 통해서 본 ‘재현된’ 현실과 ‘실제’ 현실의 참담함 사이에 얼마나 크나큰 거리가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타인의 고통』을 쓰고 있을 때 손택은 이런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시청자들은 잔인하게 묘사된 폭력에 익숙해져 버린 걸까? 매일같이 쏟아지는 이런 이미지 때문에 현실 인식이 손상된 걸까?” 손택은 스스로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고통의 재현물, 예컨대 전쟁이나 참화를 찍은 사진들을 볼 때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해 왔는지 분석해 본다. 손택의 지적에 따르면,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은 기나긴 족보를 갖고 있다.” 특히 재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고통은 신이나 인간의 분노가 낳은 것이라고 이해되는 고통이었다.

이런 고통의 재현물(예컨대 고문당하는 순교자나 박해받는 예수)은 뭔가 교훈을 주거나 본보기를 보이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었고, 이런 욕망은 얼마 안가 “사람들은 원래 소름끼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을 타고났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에 이르렀다.

“‘끔찍함 terribilit’ 속에 매력적인 아름다움이 놓여 있다”, “숭고하거나 장엄하며, 그도 아니면 비극적인 형태로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니, 유혈 낭자한 전투 장면도 아름다울 수 있다” 등등의 주장이 나오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욕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사고방식 안에서는 고통의 재현물이 더 이상 교훈이나 본보기 구실을 하지 못한다. 단지 “병적일 만큼 음란한 정신 상태”의 시각적 등가물이 될 뿐. 현대에 들어와 극한의 상태에서 발생한 현실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가 일종의 ‘포르노그라피’가 되어버리고, 이런 이미지를 보는 행위가 (의도했든 안 했든) 일종의 관음증이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더군다나, 날이면 날마다 끊임없이 폭력의 이미지가 쏟아져 나오는 현대 사회에 들어와 이미지의 성격 자체는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고, 소란을 불러 일으켜야 하며,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쪽으로 뒤바뀌어 버렸다. “쉴새없이 이미지가 자신을 드러내는 상황, 한줌의 이미지들이 반복해서 자신을 과잉 노출하는 이 상황을 그밖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돌파할 수 있겠는가?”라고 손택은 반문한다. 이렇듯 이미지 자체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갈수록 자극적인 요소들을 요구하게 되면 이미지들은 타인의 고통을 재료로 사용할 수밖에 없으며, 그에 따라 타인의 고통은 “소비를 자극하는 주된 요소이자 가치의 원천”이 된다. 바야흐로 오늘날의 문화에서는 이미지가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셈이다.

손택은 프랑스의 철학자 베이유와 영국의 소설가 울프를 좇아서 이렇게 얘기한다. “폭력을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숨을 쉬는 생생한 인간에서 사물로 변형되어 버린다”고, 즉 “인간을 하나의 개인으로서, 인류로서 구별케해줄 수 있는 바가 잔인하게 파괴되어 버린다”고. 이 말은 타인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에도 들어맞는다. 타인의 고통을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양의 이미지가 쏟아지면 사람들은 이런 고통 자체에 점점 더 무감각해진다. “한번 충격을 줬다가 이내 분노를 일으키게 만드는 종류의 이미지가 넘쳐날수록, 우리는 반응 능력을 잃어가게 된다. 연민이 극한에 다다르면 결국 무감각에 빠지기 마련”인 것이다.

따라서 손택은 이렇게 주장한다.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오히려 그런 고통을 쳐다볼 수 있는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나 잔혹한 이미지를 보고 가지게 된 두려움을 극복해 우리의 무감각함을 떨쳐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라고.

저자 수전 손택은 1933년 1월 뉴욕에서 태어난 미국 최고의 에세이 작가이자 소설가이며 예술평론가이다. 그녀는 15세에 버클리대에 입학했다가 다시 시카고대로 옮겨 대학생활을 시작한 후 17세에 결혼한다. 25세에는 하버드대 철학박사학위를 받아 각 대학에서 철학강의를 맡는 등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특히 문단과 학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64년 그녀가 31세 되던 해에 발표한 『해석에 반대한다』와 『캠프에 대한 단상』이라는 두 편의 글 때문이었다. 당시는 마침 평론가 레슬리 피들러가 『소설의 죽음』을 선언해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던 해인지라 기존의 관습과 전통에 도전한 그녀의 에세이 두 편은 모더니즘의 종언을 선포한 피들러의 글과 함께 1960년대 반문화의 서장을 연 기념비적 선언문이 됐다.

수전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예술에서 고정된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예술을 예술 자체로서 경험해야 한다"고 하며, 예술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감수성'을 이야기한다. 또한 <캠프에 대한 단상>에서는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는 전통관념을 비판하며, 비평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심미적인 체험을 제시한다.

또한 『화산의 연인』, 『미국에서(In America)』등의 소설 외에도 사회과학사의 입장에서 해석한 『사진에 관하여(On Photography)』등 여러 글을 저술했으며, 『사진에 관하여(On Photography)』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비평부문을, 『미국에서(In America)』로 전미도서상 소설부문을 수상했다.

한편 실천하는 지식인으로도 유명한 그녀는 베트남전쟁의 허위, 아메리칸 드림의 실상을 폭로하는가 하면 미국 펜클럽회장으로 있던 1988년에는 서울을 방문해 한국 정부에 구속된 문인의 석방을 촉구하기도 했다. 또한 1993년엔 전쟁 중인 사라예보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했으며, 2002년 9월 미국의 9.11테러 1주년을 맞이해 뉴욕타임스에 '진정한 전투와 공허한 은유'란 글을 실었는데, 그녀는 "대테러전쟁은 암이나 빈곤, 마약과의 전쟁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은유적' 전쟁에 불과하다"며 "그럼에도 미 행정부가 전쟁을 선포한 것은 미국의 힘을 무한정 사용하기 위한 의도"라고 주장했다.

2003년에는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거짓 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는 찬사를 받으며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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