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강사신문 도영태 칼럼니스트] 곧잘 엉뚱한 행동으로 주변을 놀라게 하는 다소 괴짜(?)인 고등학교 친구 녀석이 있다. 녀석은 남들이 즐기는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가령 세계적인 축제인 월드컵, 그것도 16강전 우리나라 경기를 보지 않는다. 그때 그 시간에 그럼 뭐 하느냐고? 서울 88올림픽 강변도로를 차를 타고 드라이브 한단다. 녀석의 말로는 ‘4년 만에 한 번씩 찾아오는 아우토반의 기회’라나. 그때는 서울 한복판에서 시속 160킬로를 달려도 단속이 되지 않는다. 경찰도 월드컵 경기를 보고 있을 테니까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용기는 대단한 것이다. 힘든 일, 어려운 일, 당면한 고민되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누구나 대부분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고 위로 섞인 말을 연발한다. 내 친구 녀석처럼 ‘즐길 수 없으면 피하라’라고 항변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어쩌면 경우에 따라 이 논리가 더 맞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생각해보자. 아니!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니, 피하지 못하는 것은 둘째 치고 무조건 즐기라는 것은 억지논리가 아닌가? 만일 피하지 못했는데 말처럼 즐기지 못한다면 더욱 괴롭고 스트레스를 받을 텐데 어쩔 것인가? 그러니 차라리 즐길 수 없을 바에야 피할 수 있는 것은 원천적으로 회피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골프를 즐기지 못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비즈니스나 대인관계의 명분으로 골프채를 잡으라 하는 것은 수학공부 하기 싫은 아이에게 수능에 도움이 되니 무조건 하라는 것과 같다. 다른 테마를 찾아서 비즈니스도 하고 관계도 돈독하게 하면 되지 않나? 하기 싫은 것에 통제받고 억지로 해야 하는 것처럼 짜증 지대로 인 것은 없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주제와 원하는 방향으로 즐길 권리가 있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스스로의 위안을 위해서 또는 애써 긍정의 메시지를 부여하기 위해서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고 즐겨보라 하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다. 더구나 내가 진정 즐길 수 없는 테마에 대해 피하는 것 조차를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더더욱 패러독스이다. 피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피함으로 인해서 다른 대체재로서 즐길 수 있는 영역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제 피하지 못할 부분, 억지 강요식 즐김 마인드 요구에 대한 반항을 해보자. 그렇게 하여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생산적인 일을 도모하는 것이 낫다. 그래도 피치 못할 사항이 벌어진다면 그 안에서 다른 즐길 수단을 찾으면 된다.

모 연수교육과정에 참여하여 도저히 관심 없고 도움 안 되고 일 푼의 재미조차 기대하기 힘든 강의를 졸음반 집중반으로 듣느니 그 시간에 몰래 책이라도 펼쳐 보자. 아니면 스마트폰질이라도 해서 유용한 곁가지 정보라도 얻어내든지.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모임에서 만날 운명이 있다면 철저하게 계획하여 모임에서 그와 멀찌감치 떨어질 준비를 해보자. 피하지 못하는 것을 즐기라는 끼워 맞추기식의 긍정마인드 부여는 현실적인 접근으로 물리쳐야 한다. 좌우지간 즐기지 못하는 것을 우선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개똥 밟는 것을 피하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밟고 나서 썩소(썩은 미소)로서 달랜다는 것은 부적절하다. 애초에 그것을 밟지 않는 것을 연구하자. 그래도 밟았다면 짜증을 뿜어내며 스트레스를 털어버려야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것은 내심 즐기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즐기는 시늉을 하라고 심리적 방어행동의 부여이다. 이는 싫은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으로 마주하라는 것과 같은 더 고통스러운 일이다. 아무래도 싫은 건 싫은 것이지 않은가?

정리하면, 즐길 수 없다고 판단되면 가급적 피하는 게 답이고 그래도 피할 수 없다면 하기 싫음을 피력할 수 있는 분출구를 찾아 대체 행동을 하도록 하자. 책상머리에도 써 놓자 “즐길 수 없으면 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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