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강사신문 이미숙 기자] 서울특별시교육청동대문도서관(관장 배경희)에서는 2020 도서관대학 사업 일환 제2기 토요인문아카데미 「연암 박지원 "다시" 보기」를 6월 13일부터 7월 4일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4회에 걸쳐 운영한다고 밝혔다.

「연암 박지원 "다시" 보기」에서는 18세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문학작품(허생전, 양반전 등)을 통해 연암의 문학사상을 고찰할 수 있으며 문학을 도구로 한 연암의 철학을 들여 다 본다. 강연은 김은영 강사가 진행한다.

프로그램은 무료로 진행되며 참가 신청 및 강좌정보 확인은 서울특별시교육청 평생학습포털 ‘에버러닝’(everlearning.sen.go.kr)에서 할 수 있다.

한편 박지원은 본관은 반남, 자는 중미, 호는 연암(燕巖)이다. 1737년(영조 13) 한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돈령부지사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랐으며, 1752년 16세 때 이보천의 딸과 결혼하였고 그 후 장인과 처삼촌에게 <맹자>와 <사기(史記)>를 배웠다. 22세 때 부터 박제가, 유득공 등 당대 실학을 공부하던 이들과 교우하여 영향을 받았으며, 30세 때는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교우하여 서양의 신학문 등을 배울 수 있었다.

박지원 <사진출처=시사상식사전>

1777년(정조 1)에는 벽파로 몰리면서 정치적 위협을 느낀 박지원은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에 은거하였다. 그의 호인 연암은 바로 이곳의 지명에서 얻은 것이다. 그 곳에서 학문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했다.

요동(遼東)ㆍ요하(遼河)ㆍ북경(北京) 등지를 여행하면서 청나라의 문물과 생활 기술 전반을 자세히 살피고, 그의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생기있는 필치로 기록하였다. 그는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와 신문물을 소개하는 동시에 배워야 할 점을 논하였고 조선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시각으로 비판하였기 때문에 그의 책은 매우 큰 논란이 되었다. 특히 당시 조정에서는 배청론이 주류였기 때문에 그의 책에 대한 반발이 매우 컸다. 그러나 재야에서는 그의 생생하고 자세한 여행기록과 재치 있는 문체, 참신한 의견 등으로 인해서 즐겨 읽혀졌다고 한다.

1786년 정조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이 되었고 이후 사복시주부, 의금부도사·제릉령,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을 역임한 뒤에 사퇴했다가 1797년 다시 면천 군수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지어 바쳤다. 1800년 양양부사에 승진하였으나 다음 해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박지원은 당시 홍대용ㆍ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北學派)의 중심에 있었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롭고 재치 있는 문체로 당시의 사회상을 포착, 여러 편의 한문소설을 썼다. 그는 문체반정 때 정조에게 문체를 타락시켰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저서에 <연암집>, <과농소초>, <한민명전의> 등이 있고, 작품에 <허생전>, <호질>, <마장전>, <예덕선생전>, <민옹전>, <양반전> 등이 있다.

※ 참고자료 : 박지원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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