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동천·삼청동천·남소문동천… 물길 모여 청계천으로

'청계천 지천 연구' 보고서 표지 <사진출처=서울시청>

[한국강사신문 이미숙 기자] 서울역사박물관(관장 송인호)은 2015~2019년 5개년에 걸친 청계천을 구성하는 백운동천, 삼청동천, 남소문동천 등 주요 지천(支川)에 대한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청계천 지천 연구' 보고서를 2020년 5월 발간했다고 밝혔다.

청계천 지천 조사 사업은 청계천박물관에서 2015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사업으로서, 청계천을 구성하는 주요 지천의 지형과 수계, 주요 공간의 역사와 공간변천의 모습을 기록해 나가는 사업이다.

이번 연구 대상 지천은 백운동천, 삼청동천, 남소문동천, 흥덕동천, 창동천으로 청계천을 이루는 주요 5개 지천이다.

청계천(淸溪川)은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성을 건립하기 전까지 이름 없는 자연하천이었다. 태종대에 와서 정비가 시작되었으나 해마다 범람하여 물난리를 겪어야 했던 개천은 영조대에 와서 준천을 통해 정비되었고, 일제강점기와 현대의 복개과정, 그리고 2005년 복원사업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한양은 물의 도시라고 불리었는데 어떤 물길들이 모여 청계천을 이루었을까?

<사진출처=서울시청>

1. 백운동천(白雲洞川) : 물길 굽이 돌아 구름 밖으로

백운동천은 청계천의 지류 중 가장 길어 청계천의 본류로 간주된다. 백운동천은 백악산 창의문 기슭에서 발원하여 인왕산과 경복궁 서측지역을 따라 흐른다. 근처의 골짜기인 백운동을 지나 백운동천으로 불렸다. 하천상에는 신교, 자수궁교, 금청교, 종침교 등 이름난 다리들이 위치하였다.

백운동천 일대의 공간은 조선시대 국가권력의 중심이던 궁궐, 사직, 사당, 관청인 육상궁과 사직단, 경희궁이 주요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통치시설들이 자리 잡았다. 해방 이후 상류지역에는 시민아파트, 중류지역에는 소규모 주택이 밀집되었으며, 하류지역은 도심 재개발에 의해 업무지구로 변모하였다.

2. 삼청동천(三淸洞川) : 백악에서 혜정교까지 물길

삼청동천은 백악산 동쪽 삼청동 계곡에서 발원하여 경복궁 동쪽과 중학中學 앞을 흘러 혜정교를 지나서 모전교 위에서 청계천으로 합류된다. 백운동천과 함께 청계천의 상류를 이루는 중요한 지천이다. 조선시대 사학의 하나인 중학 앞을 지나기 때문에 중학천으로도 불렸다.

삼청동천 주변으로는 왕실 관련 기관인 소격서와 종친부, 사간원이 주요 공간을 형성하였다. 특히 경복궁 동측에는 조선시대 왕실관련 업무를 담당했던 종친부와 종부시, 장생전이 시대별 변화를 거치며 위치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행정 관련기관, 교육기관, 의료시설, 회사 및 관련 기관이 집중적으로 위치하였다. 또한 근대식 도시형 한옥이 신흥 자본가들에 의해 지어 졌으며, 조선 사람들이 많이 밀집하여 거주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전통적 주거 지역으로 개발이 억제되었으나, 1990년대부터 전통적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관광과 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지역이다.

「도성대지도」18세기 중반 <사진출처=서울시청>

3. 남소문동천(南小門洞川) : 장충단에서 이간수문으로 흐르는 물길

남소문동천은 남산 기슭 남소영 부근에서 발원하여 장충단을 지나 광희동사거리 부근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한쪽은 국립의료원 방면에서 청계천으로 합류하고, 다른 한쪽은 동쪽으로 흘러 이간수문을 통해 성밖에서 청계천 본류와 합류하였다.

남소문동천 주변에는 조선시대 한양도성과 군사시설인 남소문과 훈련원, 하도감이 위치했으며, 대한제국기에는 애국선열 추모공간인 장충단이 들어섰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박문사가 주요 공간을 형성하며 그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기 위한 다양한 근대시설이 자리 잡게 된다. 이와 함께 일본인들의 유입도 진행되어 남소문동천을 경계로 서측지역은 일본인의 거주지로 동측인 광희문 인근은 조선인의 거주지로 자리 잡았다. 다른 지천들과 달리 가장 늦게까지 복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 군부정권의 정치적 당위성을 얻기 위한 반공과 호국, 민족과 세계화라는 키워드로 기념비, 동상, 국립극장, 자유센터 등이 세워졌다. 1980년대 이후 하류에는 동대문시장을 중심으로 전국 최대 규모의 의류도매시장이 형성되었다. 또한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가 생기며 패션과 디자인을 아우르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와 함께 한양도성의 발굴과 복원이라는 역사성 회복을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4. 흥덕동천(興德洞川) : 성균관을 감싸 반촌를 이루다

흥덕동천은 도성의 동북부를 흐르는 지천으로 서울국제고등학교와 서울과학고등학교에서 발원한 두 물줄기가 혜화로터리 부근에서 성균관을 감싸 흐르는 서반수와 동반수와 합쳐져 대학로, 효제동 일대를 거쳐 청계천으로 흘렀다.

흥덕동천 주변으로는 흥덕사, 성균관과 반촌, 경모궁, 하어의궁, 연동교회, 어영청이 주요 공간을 형성한다. 흥덕동천 일대의 공간은 조선시대부터 교육의 중심지 역할로 국가 핵심기관인 성균관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소학교에서 제국대학까지 다양한 교육기관이 생기며 여전히 교육기관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대학천으로도 불렸다. 이러한 상황에 따라 주변지역에 건설되었던 관사官舍들은 이후에도 공무원의 관사로 사용되었다. 1920년대 말부터 상류에는 혜화동 문화주택이 일제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으며, 1930년대에는 하류지역에 조선인 주도의 한옥주택이 자리 잡았다.

해방 이후 낙산 일대에 생성된 토막촌이 한국전쟁을 거친 후 국민주택으로 재개발되었다. 1975년 서울대학교 이전으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들어오면서 마로니에 공원이 조성되었고, 소극장들이 많이 생기면서 다양한 연극제들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대학로는 문화예술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사진출처=서울시청>

5. 창동천(倉洞川) : 상업과 외교의 공간을 흐르다

창동천은 남산의 서쪽 백범광장 인근에서 발원하여 남대문시장과 시청 동쪽을 흘러 청계천으로 합류한다. 창동천 주변으로는 남별궁과 대관정, 저경궁, 선혜청, 태평관과 선무사가 주요 공간을 형성하였다.

창동천 일대의 공간은 상류와 하류로 나누어지는데, 상류지역은 조선시대 구휼의 상징인 선혜청이 있었던 지역이 1897년 근대 상설시장인 창내장이 남대문시장으로 변화하며 상업공간의 특징을 갖게 되었다. 하류지역은 조선시대 외교공간이었고,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정치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남별궁 등 외교공간이 있었던 일대에 대한제국기 경운궁과 함께 환구단과 대관정이 건립되고 이에 따라 소공로가 조성되며 변화를 겪게 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환구단이 철도호텔로, 대관정이 하세가와 관저와 경성부립도서관으로 변화되었다.

청계천박물관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개천에서 20세기의 복개된 청계천과 복원된 청계천에 이르기까지 청계천과 그 주변지역의 장소와 시대와 기억을 저장하고 전시하는 도시박물관이다. 이번 사업은 청계천과 주변지역의 역사와 일상을 심층적으로 기록하는 조사연구사업으로 청계천을 구성하는 주요 지천의 물길과 지형, 역사와 주변지역의 도시공간변천을 역사학, 도시학, 지리학의 학제 간 연구로 진행하였다. 그 성과를 정밀한 지형과 지적 위에 중첩하여 실증적인 도면으로 기록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송인호 관장은 이번 보고서를 통해 “도성 내 곳곳에 흐르며 청계천 본류를 구성했던 주요 지천에 대한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향후 청계천과 주변지역에 대한 조사연구사업으로 <청계천 기획연구>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아울러 '청계천 지천 연구' 보고서는 향후 서울 도심의 청계천 지천 복원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청계천 지천 연구' 보고서는 서울역사박물관 홈페이지(http://museum.seoul.go.kr/) 혹은 서울역사자료실에서 열람할 수 있다. 또한 서울책방 홈페이지(https://store.seoul.go.kr)에서 구매할 수 있다.

한편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옛 경희궁터에 위치한 시립 박물관이다. 조선시대 이후 서울의 역사와 서울 사람들의 생활, 현대 서울로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하여 설립된 도시역사박물관으로, 2002년 5월 21일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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