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강사신문 김재은 칼럼니스트] 합정동 한 카페에서 글로벌 비즈니스 기획자, 스마트워크 디렉터 최두옥(Agnes Choi)씨를 만났다. 만나자마자 글이 무섭다는 이야기를 먼저 한다. 생각이나 경험을 말로 내뱉고 그것을 글로 옮길 때, 그 차이로 인한 오해와 왜곡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인다고 했다. 순간 ‘나는 어떨까’를 떠올렸다.

Q. 울림이 있는 스마트 디렉터

70년대 말 대구에서 태어났다. 바로 서울로 왔기에 그 곳의 기억은 없다. 아주 어린 시절, 어머니 따라 대구 외갓집에 갔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고 했다. 외갓집에는 엄청 큰 과수원과 논밭이 딸려있었는데, 외갓집에 갈 때면 마당 리어커에는 빨간 자두가 가득했고, 커다란 소와 닭들도 있었다. 그 때의 외갓집 풍경이 지금도 선하게 그리워진다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아버지는 조용한 분이었다. 말없이 도와주는 신사 같은 분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재미없고 답답한 스타일이었다. 이에 반해 어머니는 말 그대로 활발한 네트워커형이었다. 서로 다른 두 분이 갈등을 겪은 것은 강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거라고 회고한다.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어머니를 닮았고, 그녀는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단다. 생각해보니 두 분이 성격차이로 헤어질 무렵, 어머니의 나이가 지금 그녀의 나이보다 젊었을 때였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제야 어머니의 그 마음이 이해되었다.

그녀와 동생은 아버지랑 지냈고, 어머니는 외갓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자녀들이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큰 상처 없이 자라게 두 분이 많이 도와주신데 대해 감사하다고 했다. 결혼이라는 것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지만, 부모님을 통해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느꼈다.

Q. 반항을 녹여내 미래를 준비하다

그녀의 고등학교 때의 기억은 주로 공부에 집중하느라 특별한 게 없다. 가끔 좋아하는 가수를 보려고 등촌동 SBS 공개녹화장에서 줄을 선적도 있지만, 쇼핑이나 연예인보다는 함수나 지구과학이 더 재미있었다. 특히 고등학교 때에는 전교에 소문이 날 정도로 지구과학 선생님을 좋아해서 내신과 모의고사를 통 털어 한 번도 지구과학 문제를 놓친 적이 없다. 대학을 목표로 하는 여느 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학과 공부에만 집중하여 어떤 때는 모의고사에서 전국 1등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범생이’ 이미지와는 다르게 학교의 시스템이나 경쟁구도를 좋아하진 않았다. 두발검사나 야간자율학습 같은 제도권 교육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반항을 하지는 않았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좋지 않은 기록을 남기는 것 보다는 대학에 가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1998년 대학에 들어갔다. K대의 으쌰으쌰하는 분위기는 그녀에게 익숙한 분위기가 아니었고, S대에 들어가면 공부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곳은 Y대였다. 학부로 들어가 영어영문학과와 심리학과 두 개를 전공했다. 가장 경쟁이 높았던 두 전공을 차지한 ‘영심이’가 되는데 성공했다. 고등학교때 다이어리에 Y대 98학번이라고 쓰고 다녔던 기억, 농구선수 우지원의 열성팬이라 Y대를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며 웃었다.

대학에 들어갔더니 외국인도 많았고, 부모님을 따라 외국에서 살다 온 아이들도 많았다. 영어 점수는 좋았지만, 영어회화는 그만큼 잘하지 못해서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가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말했더니 가고 싶으면 얼마든지 가라고 했다. 단 직접 학비를 마련해서.

그럼 그렇지. 그녀의 아버지는 큰 딸을 늘 그렇게 독립적으로 키웠다. 혼자 자전거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에도 용돈은커녕 중간에 포기하면 집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말라며 진담이 섞인 농담을 하던 아버지였다.

결국 그녀는 인터넷으로 해외 대학 사이트와 커뮤니티 게시판에 영어로 포스팅을 올렸다. 그렇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알아보다 씨애틀에 사는 미국인 친구와 인연이 닿았고 University of Washington 근처의 친구 집에서 3개월간 머물렀다. 시애틀 공항에 도착하기 전에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집에서 말이다. 그때 3개월 머문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도 그 때 만났던 사람들과 교류가 계속되고 있다.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 느꼈음은 물론 진심으로 호의를 베풀어 준 그 친구를 그녀는 은인이라고 했다.

Q. 시도와 도전, 일상의 삶

대학을 졸업한 후 기억에 남는 것은 자전거로 20여일 전국일주를 한 것이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좋아해서 어렸을 때부터 자전거를 탈 수 있었던 것도 그 중 한 이유였을 것이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수원을 거쳐 동해 라인을 따라 울산, 부산, 거제도까지 갔다가 전라도 쪽으로 해서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여정이었다. 태풍 때문에 제주도에 가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처음에 자전거 동호회의 한 친구와 같이 갔었는데 그 친구 넘어진 후 집으로 돌아가 버리는 바람에 혼자서 외롭게 페달을 밟았다. 컨셉이 무전여행이라 친구집, 모르는 사람의 집, 역 대합실, 심지어 경찰서등도 그녀의 집이 되어 주었다.

모르는 것이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지만, 그녀는 자전거 전국 일주 경험을 통해 생각만 해도 두려운 상황도 막상 부딪혀보면 나름 길이 생기고 방법이 나온다는 것을 실감했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가기 위해 국도를 따라 산을 넘던 날, 그 날은 비가 유난히 많이 내리고 화물차들이 무섭게 질주하는데, 갓길에서 벗어나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초집중하며 몇 시간을 달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자신의 무서운 집중력을 경험했다. 너무나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느낀 소중한 것 하나, 산을 자전거로 넘으려면 계속되는 오르막을 몇 시간씩 올라가야 한다 꽤 힘들고 지루하고 숨이 목 아래까지 차오르는 상태가 몇 시간씩 지속된다. 이때 정상에 오르는 유일한 방법은 단 하나. 그저 페달 밟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Q. 2007년 한 포럼 중에

그 이후 그녀는 힘든 일이 있을 때 ‘멈추지만 말자‘라고 되뇌이는 습관이 생겼다. 결과는 바로 나오지 않는다. 멈추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고,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삶 속에 녹여냈다. 마침내 도달한 정상, 그 다음부터는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는 것을 온전하게 느꼈다. 글이나 책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대학에서 영문학과 심리학을 함께 전공했지만 영문학보다는 심리학이 더 마음에 다가왔다. 영문학과가 영어보다는 문학을 하는 곳이라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첫 직장은 한메일로 잘 알려진 ‘다음(Daum)’이었다. 아직 네이버가 힘을 못 쓸 때였다. 삼성이나 LG에 들어간 선배들을 보면서 그런 기존의 전형적인 조직들은 자신의 타입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당시 그나마 조직문화가 개방적인 곳이 ‘다음(Daum)’이었고, 졸업하기 두 달 전부터 다음의 입사를 준비했다. 요구하지도 않은 추천서를 받아가고, 최종 면접 때에는 마케팅 전략보고서까지 써서 최종 합격했다.

팀장, 본부장, 사장, 그 외에 나머지는 모두 ‘OO님’으로 부르는 개방적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일을 해보니 업무방식은 기대만큼 개방적이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저녁 9시~10시까지 야근하는 분위기에 익숙해지니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위해 내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빡센 마케팅팀에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일상이 야근이라 남자친구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늦게 퇴근하며 테헤란로를 걸으며 문득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삶을 살며 매일매일 일만 하며 사는 자신에게 물었다. ‘넌 지금 행복하니?’

Q. 2008년, 네덜란드

순간을 살아있지 못하면서 숫자로 표시되는 혜택에 속지 말자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런 고민을 하고 몇 달 후, 본부장의 부드러운 만류에 한 달을 더 연기했지만 결국은 사표를 냈다. 국내에는 더 이상 가고 싶은 회사가 없다는 생각에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샀다.

한국에 머물면서 해외 취업을 알아보는 것도 좋지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지. 대학시절 시애틀에서 만났던 미국 친구가 집 한 층을 내어줘서 비교적 편안하게 구직활동을 했다. 그러다 좋은 기회가 생겨 시카고의 지역 신문사의 스폰을 받아 비자를 준비하러 한국에 왔다.

Q. 생동감 있는 삶, 삶을 누비다

비자준비를 위해 한국에서 지내던 중 모임 공간 비즈니스를 하는 토즈를 알게 되었고, 미국에 가기 전에 놀면 뭐하나 싶어 공개채용에 지원했다. 그렇게 들어간 토즈는 7개월이 아니라 7년간 그녀의 직장이 되었다. 미국 비자를 위해서 들어간 변호사 비용은 아깝긴 했지만, 언제든 다시 해외취업을 도전하면 될거라는 자신감을 얻은 비용이라고 생각했다.

토즈에서는 처음에 온라인팀에서 일을 하다가 공간기획과 비즈니스모델을 만드는 팀에서 팀장으로 일을 했다. 스마트워크 붐이 일면서 관련 정부기관과 함께 관련 일을 하기도 했다. 그녀 스스로 스마트워크에 관심이 많았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기 위해 미국과 유럽으로 출장을 다녀오기도 했다. 두 달 가까운 해외 출장기간동안 그녀는 스마트워크에 대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들의 스마트워크에 대한 인식의 혁명이 놀랍고 부러웠다.

Q. 토즈 6주년 행사에서

귀국을 했지만 계속 일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스마트워크의 개념을 모르고 있을 때와 알게 되었을 때는 일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일하는 팀과 회사에 스마트워크를 도입하려고 나름 노력했지만, 스마트워크가 직원 한 두 사람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버렸다.

무엇보다 스마트워크를 도입하려는 리더의 의지가 절대적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기 위해 7년간 몸담았던 토즈를 떠났다. 어쩌면 스마트한 그녀의 스마트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즈를 나와 여러 회사에서 콜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이미 두 번의 회사경험으로부터 좀 더 신중한 선택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 대신 스마트워크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언리더십>을 쓴 독일의 컨설턴트 ‘닐스플래깅’을 직접 찾아가 한국 정부의 스마트워크 컨퍼런스 키노트 연사로 섭외하기도 했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세바시)의 연출을 맡고 있는 구범준 PD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스마트워크’ 주창자로서 일하는 시간과 공간을 유연성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거절차원에서 조건을 내걸었다가 그것이 오히려 인연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조건이란 ‘저는 단지 출근을 해야하기 때문에 사무실에 가지는 않습니다’와 ‘해외 프로젝트 제안이 들어오면 세바시 일과 병행할 수도 있습니다’ 두가지였다. 그런데 그 조건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근무조건보다 그녀의 가치를 알아차린 구범준 PD의 탁월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성실성과 철학, 가치를 믿어준 그가 너무도 고마웠다. 이제 세바시는 그녀에게 고향같은 곳이 되었고, 벌써 3년이 넘게 일하고 있다.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서는 목숨도 내놓는다고 하지 않던가.

구범준 PD가 무슨 일을 하든 기회가 된다면 언제까지라도 함께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서로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과 일한다는 것의 가치, 의미를 느낄 수 있기에.

Q. 자유와 책임, 일 그리고 세바시
 

그녀는 보통 2-3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 중 하나는 지난 3년간 해왔던 세바시 기획업무이고, 또 다른 하나는 IT 스타트업의 업무다. 일년에 두세 번 해외로 나가야하는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최대한 참여한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영어로 일하는 것은 그녀에게 일종의 게임과 같아서 도전정신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온라인 서비스 기획, 공간 기획, 사업기획, 마케팅 기획 등 여러 분야에서 프로젝트 메니저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한마디로 ‘기획자’이다. 그녀는 이야기한다. 스마트워크로 나아가야 인적, 물적 자원이 적은 회사에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올 수 있다고.

그러면서 업무방식이나 정보취득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새로운 사업과 관련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녀는 강조한다. 무형적인 능력,특히 네트워크 파워가 가치(돈)을 만들 수 있는 시대에 있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간과하고 있고, 세상도 그리 주목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못하기도 하고 안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그녀는 이 사업아이템을 글로벌 차원에서 하고 싶다고 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을 회피했다.

네트워크 파워가 제법 있다고 자부하고 살아온 나에게 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 귀를 쫑긋 세웠다. 어쩌면 여기에서 더 좋은 인연이 생겨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연결’이 가치를 만드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벌써부터 마음이 콩당콩당한다.

Q. 글로벌 비즈니스 기획자, 스마트 워크, 스마트 디렉터

그녀에게 큰 꿈이 있다. 바로 스마트 워크로 스마트한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하는 것! 스마트 워크의 진짜 맛을 알기에 ‘결과를 만드는 스마트 워크’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하고 실제 경험DB를 쌓아서, 정말 스마트워크가 필요한 중소기업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기회가 된다면 재미있는 펀딩 프로젝트도 열어보고 싶다고 했는데, 크라우드펀딩 사이트를 통해 기업으로부터 약 천만원 정도의 펀딩을 받아 선진국의 스마트워크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돌아와서는 펀딩한 기업들에게 그 프로그램을 다시 교육해 주는 것이다.

그녀가 참여하고 싶어 하는 프로그램은 미국의 베스트바이가 도입한 ROWE(Results-Only Work Environment, 결과 중심의 업무환경)라는 미국 현지 프로그램. 이처럼 스마트워크를 통해 많은 중소기업, 강소기업들이 더 튼튼한 기업, 강한 기업으로 성장해 나가도록 돕는 것은 그녀의 사명처럼 느껴졌다.

그녀만의 참신한 발상이 꼭 이루어지길 큰 박수로 응원한다.

그녀가 얼마 전 세상에 기여한 작은 에피소드 하나, TV 오디션 프로그램 ‘코리아 갓 탈렌트’를 통해 알게 된 댄스팀인 ‘애니메이션크루’가 작년 여름 미국 NBC ‘아메리카 갓 탈렌트’ 생방송 무대에 출연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 영어로 된 홈페이지 제작은 물론이고, 미국 방송국 스탭들과의 커뮤니케이션부터, 스폰서와 비자발급에 필요한 약 1천 만원에 달하는 비용까지 모두 그녀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애니메이션크루’는 미국 NBC 골든시간 대에 3번이나 출연했고, 많은 미국인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오늘 만난 그녀는 자신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만들고, 세상에 자신이 어떻게 쓰여 어떤 가치를 만들어 갈 것인지를 송곳처럼 꿰뚫고 있는 멋진 사람이다. 여기에 쓰여야 할 말이 바로 이것, 스마트 우먼(Smart Woman)!

스마트한 일하기는 단지 그녀의 꿈만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더불어 함께 즐겨할 할 세상이고, 함께 행복할 수 있는 밑바탕이다. 그녀의 크고 예쁜 꿈과 삶을 응원한다.

 

(사)행복플랫폼 해피허브 대표/ 행복디자이너 김재은

세상 사람들에게 행복의 가치를 전하는 행복디자이너로서 행복을 이야기(강의)하고, 글을 쓰고(칼럼/책), 연결과 가꿈을 통해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과 소중한 가치를 만들어가고 있다. 2005년 4월부터 매주 ‘김재은의 행복한 월요편지’ 필자로 활동하면서 행복(幸福)은 행복(行福)임을 꾸준하게 제안하고 있다. 특히 사람이 희망이며 서로의 좋은 관계가 행복의 원천임을 함께 나누고자 2013년 3월부터 ‘김재은이 만난 사람/해피인터뷰’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소중한 인연들을 가꾸고 이어주고 있다. 매월 첫 번째 토요일, 행복한 사람들과 걷기 모임인 ‘행복한 발걸음 모임’을 3년 이상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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