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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외유내강' 강혜정 대표, 따뜻한 세상을 꿈꾸며 작은 행동을 해 나가는 사람

[한국강사신문 김재은 칼럼니스트] 만만치 않은 삶의 여정에서 작은 희망의 끈을 내어주는, 추운 겨울날의 햇볕같은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났다. 2015년 한여름과 가을을 달군 영화, 베테랑의 제작사 '외유내강'의 강혜정 대표가 바로 그 사람이다.

Q. 사람의 세상, 따뜻한 사람

서울 미아동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강북구지만 그 때는 성북구였다. 누나를 무서워하는 다섯 살 터울의 남동생이 형제자매의 전부이다. 유년시절을 떠올리면 먼저 생각나는 곳, 아버지와 검정 타이어튜브를 타고 놀던 뚝섬 근처의 한강이다.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때 지금의 분당쪽 성남으로 이사했다. 먼지나는 비포장도로에 작은 산을 넘어 학교에 다니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 유년시절이 그리워서인가. 얼마전까지 친정 아버지와 어머니랑 함께 경기도 광주 퇴촌에 살았다. 아이들에게 고향의 느낌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여러 추억 때문에 힘들어하셔서 상일동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가보자. 성남에 쭈욱 살다가 고3때 서울로 이사했다. 자녀들의 학교문제로 일찍감치 좋은 학군으로 가서 자리잡고 준비하는 세상과는 너무 동떨어진 선택이었던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아마도 여자가 무슨 대학이냐며 딸의 대학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던 것 같았다고.

어쨌거나 대학에 가고 싶었다. 고1때였다. 학원은 꿈도 못꾸고 1주에 한 번 오는 학습지로 감지덕지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대학교 소개 내용이 나와 있었다. 그 해 겨울방학때 소개된 대학에 구경가고 싶어 혼자 무작정 갔다. K대였다. 캠퍼스가 너무나 멋졌다. 그 옆에 바로 F대에도 들렸다. 아는 내용은 없었지만 거기는 작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 학교를 돌아보고 버스를 잘못 타고 내린 곳이 또다른 K대 정문이었다. 지금도 아스라이 그때 보았던 정문이 기억에 남아있다고 했다. ‘와,정말 멋지다.’ 이 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저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이제야 밝히지만 그 학교 벤치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왔단다.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성적도 그리 좋지 않았고, 시골학교에서 과연 가능할까? 그 학교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Q. 작은 꿈의 실현

고3이 되었다. 담임선생님이 어느 학교에 갈 건지 물었을 때 바로 ‘K대요!~’ 바로 답변이 튀어 나왔다. 어이없어 할 줄 알았던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좋아, 올해는 네가 다크호스다!’라며 격려해주었다. 선생님이 포기하지 않고 나에게 기대를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큰 힘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고등학교 3학년 1년동안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곁에 있는 친구들도 많은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었다. 그 결과 무사히 K대 사범대에 들어갔다.
 

원하던 대학교에 갔지만 조금 다른 삶을 살았다. 2학년때부터 세상의 문제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사실 대학에 가기 전에는 사회문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늘 들어온 이야기가 공부 열심히 해서 농협이나 새마을금고등에 취직하라는 거였다.

그러다보니 공부는 조금 뒷전이었다. 사업을 했던 아버지는 첫 번째 등록금 딱 한 번 대주고, 앞으로는 ‘네가 알아서 해라’했기에 성적외의 장학금을 받으려고 열심히 뛰어다녔던 기억이 새롭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젊은 대학생들 세대에게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든다고. 그 당시는 사회문제가 시위구호였는데 요즘은 눈앞의 생존문제에 쩔쩔 맬 수 밖에 없다는 게 안타깝다는 것이다. 여전히 세상은 문제 투성이인데.

하지만 자신을 포함한 세대가 성찰을 해야 한다며 한마디 덧붙인다. 세상의 변화를 꿈꾸었으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기성세대가 되어 오히려 세상 문제의 진원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 돌아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사교육 문제에 있어 그들 세대의 책임이 막중함을.

곡절 끝에 대학 졸업은 무사히 했다. 사대를 다녔으니 선생님이 되어야 했지만 그렇게 흘러가진 않았다. 교생실습도 하고 졸업후에 모교에 가서 땜빵 선생님도 해 보았지만 그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눈에 띈 영화실습워크샵 팜플렛 한 장이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계기가 되었다.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고, 관심도 별로 없었던 터여서 왜 그게 눈에 띄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다고 했다.

Q. 영화, 그 사람, 신기한 인연

어쨌거나 독립영화협의회가 진행한 그 영화실습 워크샵에서 평생의 반려자가 된 류승완 감독을 만난 것이다. 류감독은 그 때 이미 그 워크샵을 마치고 조교로 활동하고 있었다. 어찌 하다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친근감도 생겼다. 처음엔 영화는 대학나오고 소위 먹물을 먹은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저 친구는 고등학교밖에 안나왔는데 영화를?’ 그것은 그녀의 선입견일뿐 류감독은 뭔가 다른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밝은 모습인데다 영화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관심이 갔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가 어머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와, 나이 차이가 나는 남동생과 함께 사는 청년 가장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가슴 아픈 가정환경에도 얼굴에 그늘이 없이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그가 마음에 끌렸고, 둘은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다. 연하 청년가장과의 아름다운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두 사람은 연애를 하면서 영화 선배들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 땅에서 영화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고, 결국 버티고 버티다 이혼까지 하는 사례도 많이 보았기 때문에 걱정도 되었다. 그래서 ‘우리 10년만 영화를 해보자. 그러고도 길이 안보이면 다른 일을 하자.’고 약속했다.

연애한 지 5년이 지나 집안의 강력한 반대에도 결혼을 했다. 부모가 없고, 고등학교 졸업에 나이가 어리고, 할머니와 어린 동생까지 부양해야 하는 ‘문제투성이’의 가난한 영화감독 지망생을 어느 부모인들 선뜻 받아들였을까. 특히 아버지의 반대가 컸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그 때 아버지가 화가 나서 성냥갑을 집어던졌고, 방바닥에 쏟아진 성냥개비를 하나하나 주워 담으며 울던 시절의 모습이다.
 

아무튼 97년에 결혼을 했고, 98년에 큰 딸 의진이가 태어났다. 결혼 후 류감독은 영화에 대한 자신의 꿈과 현실의 생활을 모두 원만하게 해 나갈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가족 생계는 챙기며 일해야 한다는 나름의 원칙도 지켜나갔다. 그래서 6개월은 어떤 일이든 닥치는대로 일을 해서 1년치 생활비를 벌어 통장에 넣어두고, 나머지 6개월은 영화일을 해 나가는 용의주도함을 잃지 않고 살았다.

어머니가 결혼에 찬성으로 돌아선 이유도 얼굴에 그늘이 없어 좋다는 것과 저 사람이면 가족들은 안 굶기겠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고. 아무튼 너무 일찍 어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류승완 감독의 삶이 그대로 지금까지의 영화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것 같다며 마음이 짠하다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살짝 스쳤다.

가난한 영화감독 지망생과 함께 하기로 했으니 처음 3년 동안 연애비용은 물론 작은 힘이나마보태야겠다는 생각으로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학원 원장의 딸을 잘 이끌어 준 인연으로 고액과외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학원생활을 통해 수천만원을 벌 수 있었고, 그 후 학원을 그만 두었다. 그 돈으로 결혼준비을 하면서 이제 제대로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위에선 학원강사를 통해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 무슨 영화를 하느냐며 만류했지만 누구도 이를 말릴수는 없었다.

영화사를 하면 우리 영화사는 ‘외유내강’으로 하자고 진즉에 이야기를 해 놓은 터였다.내가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처음엔 괜찮은 사자성어를 선택했구나 했다. 겉으로는 강한 척 하지만안으로는 힘없이 살아가는 우리네 삶이기에 밖으로는 부드럽지만 안으로는 강하게 살아가자는 희망을 담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었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강혜정 대표와의 첫 인연이 ‘강한’ 인상이었기에 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Q. 외유내강, 부드러운 듯 강한 영화사

앗, 그런데 순간 스치는 게 있었다. 류승완 감독의 ‘유(류)’와 강혜정 대표의 ‘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후에 이름에 대한 스토리는 알게 되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영화사 외유내강, 참 멋진 이름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류 감독은 94년 무렵부터 영화 제작 연출부에서 조감독 역할을 하며 단편영화 작업을 계속했다. 단편영화 패싸움으로 98년에 부산단편영화제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그 때 받은 상금으로 만든 영화 ‘현대인’으로 1999년 제25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그 후에 여기저기에서 영화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돈이 없어 옴니버스 형식의 단편을 제작했다. 그 첫편이 ‘패싸움’이었고, 세 번째가 ‘현대인’이었다. 그 후 2,4편까지 모아서 하나의 영화로 만든 것이 밀레니엄 2,000년에 제작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였다.

장편으로는 사실상 류승완 감독의 데뷔작이었다. 전주영화제에서 선을 뵌 이 영화는 서울 종로 코아아트홀에서 상영하여 8만5천명이라는 관객을 모아 한마디로 대박을 쳤다. 새로운 형식의 영화에 감독,배우는 물론 모든 스텝들이 함께 하여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정재영,임원희등의 배우도 그 결과의 주역이었다. 이런 형태로 영화를 만들어 좋은 결과를 만드니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고졸 감독, 인간 류승완 스토리가 그 당시에도 화제가 되었다. 학벌의 중요성이 예전같지는 않지만 여전히 위세가 남아있기에 오히려 주목을 받게 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올해 영화 베테랑이 엄청난 결과를 만들면서 류승완 감독은 고졸,동생인 배우 류승범은 중졸, 영화사 강 대표는 대졸이라는게 다시 한 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실 좋은 영화하고 가방끈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현실적 한계까지 부인하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류 감독이 고졸이라 괜찮은(이른바 세속적으로 보면) 친구들을 만나기가 어려운 점은 있었을 거라는 이야기이다. 아무튼 영화로 좋은 결과를 만든 후에 내놓라 하는 대학에서 졸업장을 줄테니 오라는 제안을 여러 번 받았다.작지 않은 유혹이었지만 이것은 아닌 것 같다며 정중히 거절했다고. 우선 나름 유명세의 감독인데다 학교간판이 필요해서 왔으니 온전한 친구관계가 어려울 것이고, 바쁜 삶에 학사일정에 신경쓰느니 그 시간을 좋은 영화 만드는데 사용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구나 일종의 특례입학이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 무렵 일본에서 활동하던 가수 보아에게도 비슷한 제안이 여러번 들어왔는데 모두 거절했음을 상기하며어쨌거나 류 감독이 ‘보아’급 인거야? 하며 웃었다며 지나간 시절을 떠올렸다. 아무튼 두 사람은 이런 저런 세상일과 부딪힐 때마다 얻은게 많다고 했다. 잘 하는게 많지 않아 다른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에 그저 포기하지 않고 견뎌왔다고 했다.

Q. 영화, 그 진한 사랑

밀레니엄 즈음 닷컴 열풍시에도 돈을 쫓아다니지 않고 잘 버텼고 드라마 제작 제안도 받았지만 다 뿌리친 두 사람이었다. ‘한국영화 하면서 밥벌이만 하면 행복이다’라는 그런 ‘처음처럼의 마음’, 초심을 잘 지켜왔다. 영화외에 다른 것은 모른다. 다른 것을 할 만한 역량도 노하우도 없다는 생각으로 그저 영화라는 한우물만을 파 온 것이다.

류감독이 한국영화에 고군분투하고 있는 동안에 강 대표는 2000~2004년 ‘좋은영화사’에서 실장을 맡아 이런저런 경험을 했다. 말이 실장이지 말 그대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일이었다. 특히 경남 남해에서 전체가 현장 로케이션으로 진행된 영화 제작시에는 스텝들의 얼음물,수건,쓰레기 청소등 온갖 잡무를 하면서 ‘좋은 영화’란 결국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짐을 절감했다고 했다. 그 때의 그 경험이 책상머리,데스크의 삶의 한계를 벗어나 현장의 애환과 고통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영화사 외유내강은 셋째를 가진 2005년에 설립되었다. 영화사 설립후 첫 영화는 짝패였다. 그 후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를 제작했다. ‘다찌마와 리’는 2000년 초반 인터넷 붐이 일었을 때 만든 인터넷 영화를 반코메디 영화로 개조하여 만든 것이다. 다찌마와 리는 현장에서 유행하는 액션영화를 칭하는 말이다.
 

류 감독등 3인의 인터넷 영화는 당시에 반응이 폭발적이었지만 다시 극영화로 만들어 2008년 개봉했던 이 영화는 크게 실패했다. 안이하게 생각한 나머지 새로운 변화를 주지 못한 게 주 원인이었다. 투자자들은 실망했고 시나리오가 계속 거절당하면서 투자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안좋은 일은 겹쳐 일어난다고 했던가.

영화 실패로 직원 월급도 지급하지 못하고 마침내 2009년 봄에는 영화사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문을 닫으면서 보증금도 날아갔고 집기보관도 허름한 창고를 빌려 보관하면서 기약없이 후일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암에 걸린 아버지가 그 해 봄에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3개월 남짓동안 정말이지 이제 어떡하나 막막한 시간속에서 멍하게 지낸 것 같다고.인생, 희노애락의 롤러코스터를 타다 하지만 인생에서 죽으라는 법은 없는 법, 멍하게 지내고 있을 때 한 광고대행사로부터 관광공사 중국홍보영상 제작 의뢰가 들어왔다.

살길이 열린 것이다. 그 일로 밀린 직원들 월급도 주고 지금의 사무실도 구해 다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아직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페인트를 사다가 사무실 내부를 직접 꾸미기도 했다. 2010년 다시 사무실을 열면서 영화사에는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강 대표는 영화 ‘해결사’ 작업에 함께 하게 되었고, 류 감독은 영화 ‘부당거래’를 제작했다. 2000년대초에 순조롭게 잘 나가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경험이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하였다. 앞으로 어떡해야 하는지도 많이 배웠다.
 

그래서 영화 ‘부당거래’ 제작은 전보다 훨씬 더 심혈을 기울였다. 큰 성공은 아니었지만 의미있는 결과를 일구었다. 이 영화를 통해 ‘류승완 감독식 영화’라는 브랜드를 많은 이들에게 각인시켰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곡절도 시련도 견뎌내며 뚜벅뚜벅 걸어나가다 보니 좋은 결실이 맺어지기 시작했다.
 

2013년 1월에 개봉된 영화 베를린은 717만의 관객이 찾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어서 2014년에는 영화 베테랑 제작에 들어갔다. 영화 베테랑은 사실 2014년 가을 개봉예정이었으나 배급사의 전략과 상황들의 영향으로 시점을 계속 저울질하다가 2015년 8월 5일에 개봉했다. 뭐라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야구로 치면 주자 만루의 상황에서 적시타를 쳤는데, 그게 홈런이 된 격이었다. 11월 초까지 이어진 상영에 무려 1340만의 관객이 모여들어 명량과 국제시장에 이어 한국영화 역대 3위에 올랐다.
 

영화 베테랑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잘 살지는 못하더라도 쪽팔리게 살지는 말자’등의 명대사를 남기며 안하무인 유아독존 재벌 3세를 쫓는 베테랑 광역수사대의 활약을 그린 범죄오락액션물로 우리나라 영화사에 작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제작과정중에 스턴트맨 한 사람이 명동 촬영시 위험한 상태에 이르기도 했지만 다행히 큰 탈없이 마무리되어 고마웠다고.

다음에 베테랑 속편을 준비할 예정이라고 나에게만 살짝 귀띰해 주었다. 속편에서는 더 센 놈(?)을 데려와 반드시 법정에 세워야 하지 않겠냐며 웃었다. 아울러 베테랑의 좋은 결과에 대해 그 동안 고생한 스텝들에게 나누겠다는 그녀는 얼마전 바람도 쐴 겸 평택 쌍용자동차 와락에 작은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마음이 아픈 아이들에게 운동화도 나누어주고, 밥차를 준비하여 밥도 함께 먹고 왔단다. 그녀다운 행보이다. 또한 베테랑의 좋은 성과의 일부를 비영리 영화단체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말한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하지만 이번 베테랑의 성과가 그 동안 삶에 직면하여 힘있는 삶을 살려고 애쓴 노력의 결과인 것 같아 참 좋다고. 여기서 잠깐 그녀의 다른 삶으로 돌아온다.    이제 18세가 된 딸아이와 그 동안 서로 힘들었던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잠시 상념에 젖는다.

최근에 좋은 교육프로그램을 만나 ‘내 모습’을 직면하게 되면서 딸아이를 이해하고 모녀가 원만한 소통으로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어서 참 좋다고 했다. 그 동안 내가 딸아이를 내 프레임으로만 바라보며 말썽꾸러기인 딸이 단순히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 엄마인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주고 있는데에 대한 분노가 컸음도 알게 되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데 딸아이가 말했단다. ‘엄마, 나 그것 알고 있었어. 엄마가 나를 부끄러워 하고 있구나. 하지만 엄마가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 다 알아’   그 동안 효율성이 좋은 엄마만을 꿈꾸며 살아온 것 같아 마음이 많이 아프고 많이 울었다고 했다. 이제 진정으로 딸을 이해하고 응원하는 진짜 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며 진지하게 웃는 그녀가 참 멋져보였다.

여기서 나와의 인연을 이야기해야겠다.

2009년, 나의 딸 정인이가 강동구에 있는 외고에 예상치않게(?) 입학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옥수동의 집에서 다닐까 생각하고 별 준비를 하지 않았는데 몇 일 다녀보니 아이가 너무 들어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이사갈 집을 알아보고 전셋집을 구했다. 연이란 참으로 신기하다. 한참후에 알게 되었지만 이사간 집이 바로 강 대표(아니 류감독? ㅋㅋ)의 이었다. 처음에 집수리중에 문제가 생겨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의 흔히 있는 일) 언성을 높이며 시시비비를 하면서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경험을 했다. 그런 에피소드를 통해 좀 더 서로를 이해하게 었다. 어쨌거나 집문제는 해결을 했고, 그 집에서 2년간을 살았다. 그 집은 사계절 경관이 좋아 재은의 월요편지의 좋은 소재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딸아이는 재수를 하긴 했지만 무사히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고, 더구나 강 대표의 대학후배가 되어 더욱 기한 인연이 되었다. 그 후 월요편지의 독자가 되어 좋은 인연이 이어졌고, 내가 주도하는 모임에도 함께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좋은 교육프로그램에도 함께 하며 힘있는 삶을 만들어가며 우의를 다져오고 있다. 영화와 삶을 통해 일관되게 녹여온 가치를 알기에 무엇보다 류승완식, 강혜정식 다음 영화가 궁금했다.

멜로영화를 두세편 준비하면서 요즘 핫이슈가 되고 있는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를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이번 영화는 류감독이 아닌 신인감독과 함께 하고 있는데 보수,진보를 떠나 우리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에 제약이 있고, 정치적 민감성을 고려하여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고. 너무 무겁거나 정치의식에 집중하지 않으려 하고 있으며 배경은 한일국교정상화협상이 이루어진 60년대 중반이 될거라고 이야기했다.

또 하나의 영화는 류승완 감독이 직접 메가폰을 잡는 영화 군함도이다. 군함도는 미츠비시 재벌이 징용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전쟁군수물자를 만들던 섬이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지만 최근에 일본이 유네스코에 인류문화유산으로 등록한 곳이기도 하다. 이 영화 또한 가급적 역사의식은 가볍게 다루되 재미와 흥미를 가미하여 함께 즐기되 메시지는 분명하게 가져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고.

Q. 새로운 시작, 여여한 발걸음

하지만 지난 11월 제작팀이 군함도를 다녀오면서 일본제국주의의 착취가 어마어마했음을 알고는 여러 가지로 고민이 늘었단다. 아무튼 관점을 열어놓고 너무 무겁거나 어렵지 않게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내년 5월부터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강대표에게 꿈을 포함한 앞으로의 이야기를 물었다. 바로 용수철처럼 튕겨 나온 답변은 ‘반전운동’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삶이 전쟁 아닌게 없고, 지구촌은 전쟁과 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고통을 겪고 있기에 이를 최소화하는 일에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을 돌아보면 사람에 대한 관심과 헌신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음 세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헌신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행동하려고 한다고. 한 세상 살다 가면서 진정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지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그녀의 이야기에 마음이 뭉클해져왔다. 역시 흔들림없이 사람의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영화 베테랑을 통해 용기를 얻었다며 너무 고마운 영화와 찾아준 관객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 영화 덕분에 다음을 준비할 수 있어 참 좋다는 그녀이다. 1,000만 넘는 영화가 그리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지만 어쩔수없이(?) 나온다면 영화사 외유내강이 만든 영화였으면 좋겠다는게 나의 솔직한 마음이다. 외유내강과 강 대표나 류승완 감독이라면 희망어린 영화, 사람다운 세상을 위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 때문이다.

Q. 사람의 세상, 좋은 삶을 향하여

요즘 공부를 하면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지금까지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었는데, 이제 자신 스스로 작지 않은 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삶과 좋은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제안하고 요청하는게 자유로워졌다는 그녀의 얼굴에 살아있는 기운이 넘쳐흘렀다.

아무튼 좋은 삶을 향한 다양한 길에서 그녀를 만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스친다. 좋은 인연이 되어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함께 할 거라는 기대도 해 본다. 꼭 그럴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온기가 있는 따뜻한 세상을 꿈꾸며 작은 행동을 해 나가는 사람, 화로운 세상, 헌신의 삶, 다음 세대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강혜정 대표!~ 영화이든 그녀의 삶이든 그녀가 가는 길에 축복과 평안이 있기를 빈다. 리고 그녀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암사동 사무실에서 나오니 삶과 세상이 환해오는 느낌이 온누리에 가득하다. 참 좋다.

 

(사)행복플랫폼 해피허브 대표/ 행복디자이너 김재은

세상 사람들에게 행복의 가치를 전하는 행복 디자이너로서 행복을 이야기(강의)하고, 글을 쓰고(칼럼/책), 연결과 가꿈을 통해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과 소중한 가치를 만들어가고 있다.

2005년 4월부터 매주 ‘김재은의 행복한 월요편지’ 필자로 활동하면서 행복(幸福)은 행복(行福)임을 꾸준하게 제안하고 있다. 특히 사람이 희망이며 서로의 좋은 관계가 행복의 원천임을 함께 나누고자 2013년 3월부터 ‘김재은이 만난 사람/해피인터뷰’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소중한 인연들을 가꾸고 이어주고 있다. 매월 첫 번째 토요일, 행복한 사람들과 걷기 모임인 ‘행복한 발걸음 모임’을 3년 이상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김장욱 기자  together@lecture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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