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획 ②] 장애인 복지와 재활을 이뤄낸 장애인대부, 에덴복지재단 창립자 정덕환 회장은 누구인가?

[한국강사신문 정헌희 기자] 장애인 직업재활에 대한 정책과 제도가 부족했던 1980년대, 정덕환 회장은 ‘에덴복지원’을 설립했다.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의 복지와 재활을 위해 오늘도 동분서주하는 정덕환 회장.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 시에 곡을 붙인 이 노래를 장애인 대부 정덕환 회장이 부른다. 73세 고령의 나이에 가수가 된 정덕환 회장, 그는 ‘흔들리며 피는 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자료=에덴복지재단>

Q. 최근 음반을 내셨는데, ‘흔들리며 피는 꽃’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도종환 시인의 대표 시(詩) ‘흔들리며 피는 꽃’에 이민욱(한국기독교문화예술 총연합회 예술총감독) 감독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노래에요. 돈과 명예를 떠나 오직 이 땅의 소외된 자들과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노래를 만들자는 저와 이민욱 감독의 염원이 함께 들어갔어요.

예능·방송인들이 모이는 선교단체에서 이민욱 감독을 만났는데, 저더러 ‘흔들리며 피는 꽃’ 노래를 불러보라고 하더라고요. 계속 부르다보니 제 삶을, 딱 저를 노래한 것이더라고요. 사고 당시 횡경막까지 손상을 입어 노래를 부르는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흔들리며 피는 꽃’ 3분 30초 노래를 연습하는데 꼬박 1년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힘든 연습시간을 견뎌내며 음반을 내는 데에는 ‘흔들리며 피는 꽃’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제 주변의 어려운 장애인들,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쉽게 낙심하고 좌절하며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세상에 흔들리며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겠어요? 모두 흔들리고 엎어지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그러는 거지요. 장애를 가진 나도 이렇게 어려움을 극복해 오고 있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제발 흔들린다고 쓰러지지 말라고... 이 할아비도 이 나이에 꿈을 꾸고 도전하는데,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앞을 향해 걸어가 보자! 꿈꾸는 청년들에게 청소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사진=에덴복지재단>

Q. 전 국가대표 유도선수였는데, 유도를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저는 3남 1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어요. 어릴 때 저는 힘도 세고 장난기 많은 개구쟁이였어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를 손으로 누르고 도망가기도 하고, 굴뚝으로 들어가 아궁이로 나오는 장난도 서슴지 않았죠. 부모님과 형제들은 이런 나를 혼내지 않고 많이 사랑해 주었습니다. 운동을 좋아하고 잘했기에 중학교 때는 잠시 야구선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제일 큰 형님은 유도 선수였어요. 어느 날 큰 형의 모습을 보는데, 너무 멋있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속으로 ‘나도 형처럼 유도선수를 해야지’ 라고 마음을 먹고, 유도를 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유도 명문고인 성남고에 특기생으로 스카웃 되었어요. 유도부 주장을 맡아 전국 대회에서 연전연승, 일본 시합에서도 모든 상대를 가볍게 이겼지요. 이런 실력을 인정받아 고등학교 3학년 때 이미 국가대표 유도선수로 선발되었어요.

연세대학교 진학 후, 매형의 도움으로 영국에서 유도코치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어요. 영국에서 경험을 쌓은 후, 국제적인 유도지도자가 되어와야지 라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동료와의 훈련도중 불의의 사고로 전신마비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Q. 사고 후 생활엔 어떤 변화가 있으셨나요?

사고 후 병원에 옮겨져서 치료를 받는데 3일을 넘기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렵게 수술을 한 저는 목 아래는 감각이 없는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재활훈련을 할 때 캐나다에서 온 구애련 선교사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분의 정성과 기도로 움직이지 않던 손의 감각이 돌아오게 되었어요. 저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일어서는 연습을 했지요.

그리고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 있게 되었어요.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장애인이 되어 밖에 나가니, 정상적인 몸 일 때는 겪지 못했던 사회적 멸시와 차별을 느꼈어요. 택시운전 기사의 승차 거부와 모교 대학에 유도코치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일 등이었어요. 한 집안의 가장으로써 아빠로써 떳떳해 지고 싶었죠. 그런 던 중 우리 집 아파트 앞에 ‘이화식품’이라는 구멍가게를 열게 되면서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됐고, 생활하는데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고, 그들의 복지와 재활을 돕고 싶었어요. 에데복지원의 시작이 된 거죠.

Q.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이런 생각 드시지 않으셨어요?

저는 긍정적이에요. 동료와의 훈련 도중 사고로 다쳤잖아요. 너무 실의에 빠져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순간순간 이지만 누군가가 뛰어가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나도 막 뛰어가고 싶어! 나는 왜 안 돼지?’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낙심되지요. 그럴 때 일수록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했어요. 그리고 속으로 또 나에게 말하지요. “정덕환이 이대로가 아니야. 다시 정덕환의 예전 모습으로 살아 갈 거야!” 이렇게 다짐하며 순간순간을 살아있음에 그리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고 이후 내게는 말할 수 없는 몸의 고통이 있어요. 잠 잘 때 잠시 느끼지 못할 뿐, 형용할 수 없는 통증이 나를 힘들게 해요.

<사진=에덴복지재단>

성경 말씀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10장 13절)’ 아프고 힘들 때마다 말씀과 기도로 이겨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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