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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코칭센터 김한수 대표, 영원한 행복의 노래, 신의 한 수

[한국강사신문 김재은 칼럼니스트] 삶에 힘겨워 하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자유와 행복의 에너지를 듬뿍 전해 줄 것 같은 사람, 참나코칭센터의 김한수 대표를 종로 사무실에서 만났다.

Q. 당돌한 아이, 생각이 깊은 아이

60년대 중후반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다. 그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김해김씨 안경공파 종가집의 종손이다. 증조할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셨는데 이것을 본 할아버지는 술을 거의 안 드시고 근면 검약하는 삶을 사셨다.

할아버지는 강원도에서 손에 꼽히는 임업사업가였다. 서울까지 뗏목으로 나무를 실어 나르기도 했다. 아버지는 이런 할아버지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임업에 종사하면서 작년까지 산림조합장을 맡는 등 이 분야에서 오랜 시간동안 일했다.

김한수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바르고 모범적인 아이, 나이보다 성숙한 아이로 자랐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자란 것도 영향을 준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북한 신의주에서 6. 25전쟁 때 피난 내려온 집안의 장녀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고 서울에 와서 제약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임업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던 할아버지 덕분에 아버지는 대학 때 하숙을 했는데 하숙집 주인의 소개로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다.

지역의 리더였던 할아버지는 가정 내에서는 엄격했지만 밖으로는 인심을 베풀고 자상했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몰려와 인민재판이 벌어졌을 때 산림일군들이 할아버지를 옹호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할 정도였다. 그 이후엔 할아버지는 더욱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갔고, 아버지도 그 영향 속에 있었다.

유치원 시절 약한 친구들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도와준 기억이 나고, 초등학교 때는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친구들과 같이 나눠먹고, 그것이 알려져 상을 받기도 했던 기억도 오롯이 생각난다고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웅변대회에 나가는데 선생님이 원고를 써주지 않고 알아서 하라고 했을 때 당혹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혼자서(어머니가 써 준 것이 있었지만) 두려움에 덜덜덜 떨다가 겨우 마치고 왔던 기억을 통해 ‘세상엔 내가 스스로 해야 할 것이 많구나, 준비가 안 되면 힘든 일이 많구나’를 몸소 체험했다고.

그 후엔 준비를 잘 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하게 되었고, 6학년 때는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6학년 때 반장을 했는데 미술공작시간에 아이들이 만든 꽃 중 잘 만들지 못한 것들을 버렸다가 선생님에게 호되게 혼이 난 적이 있었다. 아마 20분 정도 계속 맞은 것 같다고. 친구를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하는 생각 한편으로 그래도 이렇게 맞아야 하는지 의문이 일어났고 했다.

친동생인 김필수 스피릿컨설팅 대표와는 의좋은 형제였다. 그런 동생이 초등학교 때 마비증세를 보여 움직이지 못하고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을 전전긍긍하는 바람에 안타까웠던 기억도 있다. 재능이 많은 동생이 아프고 힘들어하고, 부모님이 마음을 쓰며 애쓰는 모습에 나라도 동생을 잘 보호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살았던 것 같다고 했다.

재수를 해서 한양대 사회학과에 들어갔다. 사회와 정치경제 등에 관심이 많았고, 중학교 때부터의 꿈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이었고, 30대 후반까지도 그랬던 것 같다고 같다면 웃었다.

주위에서도 너는 꼭 대통령이 될 거라며 응원도 많이 해 주었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서울로 보내주랴 하며 이야기를 했을 때 고등학교 때까지는 지역에 있겠다며 줏대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무튼 청소년기에 이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겉으로 보여 지는 모습 너머 감추어진 모습까지 생각하게 되었고, 언젠가는 기독교적인 제한에서 벗어날 때가 올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Q. 진실된 삶, 본질적인 삶

대학에 가서 사회변동에 관심이 많았고, 총학생회 회장 선거에 출마를 하기도 했다. 88년에 총부학생회장으로, 1989년에 학생회장에 출마하여 1년 선배였던 임종석 전 의원과 겨루기도 했다. 비운동권으로 나갔는데도 투표결과가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놀라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눈앞만 바라보는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전 세계 속에서 국가와 민족을 바라보고 준비해나가는 시대정신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맨날 민중,민주만 따지며 사는 모습이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고, 본인 스스로도 적금 부은 것을 깨서 선거에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세상의 많은 것을 배웠다.

대학 1학년 때에 어떤 선배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이 순식간에 달라지고, 민족해방이니 민중민주니 하며 편을 가르고 서로를 증오하고 이면에서 암투하는 모습을 보며 관념이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실감하게 되었다고 했다. 진정 자유로운 존재, 그런 세상을 꿈꾸면서 관념의 노예가 되어가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웠다고 했다. 사람이 사상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상에 사람이 끌려 다니는 모습에 삶의 회의가 밀려왔다.

종교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몰입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식상한 모습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났다. 그는 이런 현실 속에서 죽어도 좋고 병신이 되어도 좋으니 신이 있다면 제대로 알아보고 싶었다. 진리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진실 된 것에 대한 갈구가 컸다.

선언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다 벌을 받아도 좋으니 알아보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한마디로 나를 떠난 밖의 이념이나 종교, 도그마에 대한 맹신에 대한 저항이 컸다.

이는 중학교 때부터 탐구해 온 삶과 진리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만든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부의 어떤 변화도 나의 변화가 담보되지 않으면 근본적인 변화에 이를 수 없다는 것, 그는 세상의 흐름을 빨리 파악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대학생활의 말미에 소련이 무너지며 세상에 많은 혼란이 야기되었을 때였는데 그는 이미 그 변화에 대한 대응의 싹을 이미 키우고 있었다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가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가면서 주장한 ‘학생은 학생답게 대학은 대학답게’라는 구호가 단순한 이념이나 구호 차원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 실제적인 변화를 만들어가고 거기에 대학도 마찬가지라는 것, 그것이 어쩌면 본질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행복이 무엇인가, 우리의 삶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를 탐구해 나가는 그에게 수행자의 모습이 어려 있었다.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면서 술을 팔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면서 탁발하러 온 스님을 문전박대하는 크리스챤 어머니를 보면서 진정 우리가 추구하고 살아가야 할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는 그이다. 삶 한복판에서 인간적 삶에 대한 고민을 껴안고 살았던 것이다.

군대 다녀와서 1994년에 바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큰 세계로 가서 자신의 뜻을 펼쳐나가고 싶었다. 워싱턴DC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교 대학원과정에 입학했다. 전공은 정치학, 로비에 대해 공부를 했다. 우리에겐 생소하고 그리 좋지 않은 이미지가 있지만 미국에서는 로비가 합법적이고 중요한 삶의 부분이기도 하고, 학문적으로도 주목 받는 분야였다. 학업을 하면서 당시 시민운동을 하던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미국에서 8년을 보냈다. 석사과정만 했다. 박사까지 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학문보다는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탐구하는 욕구가 간절했다. 그가 미국에 있을 때가 한국의 IMF 외환위기와 겹치는 시기였다. 게다가 권총강도를 당하기도 했고, 환율이 급상승하고 생활이 어려워 야채장사 등 여러 허드렛일을 닥치지 않고 했다.

Q. 미국, 새로운 각오와의 만남

미국에 있으면서 연방의회 인턴을 하기도 했다. 외국인이 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특유의 적극성과 돌파력으로 좋은 기회를 얻었다. 케네디 대통령 때 뒤에 대통령이 된 클린턴도 연방의회 인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더욱 신이 났다. 역시 말하는 대로 되는구나. 중학교 때부터의 꿈, ‘대통령’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나중에 대통령이 되자, 그러다가 케네디처럼 죽더라도 멋있게 죽자, 통일된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 백두산에서 내려오다 간디처럼 총을 맞아 죽자 이런 생각을 했다. 아무튼 그 당시 한국에서도 연방의회 관련 로비차원에서 연락이 많이 오기도 했다. 백악관에도 초청장을 받아 가 보았다. 클린턴 대통령 때였다. 그의 적극적 성격이 나은 결과였다.

그러다가 2002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일 월드컵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강원도의원 출마를 했는데 불리한 상황이라고 도와달라는 SOS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9.11 테러 사건 후 로비에 대해 더 공부하려고 했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미국생활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아버지는 무사히 당선되었다.

8년간의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와 아버지의 선거를 도운 후 그의 인생에 있어 일대 전환점이 된 신병천 마스터 코치와의 만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02년 코칭 컨설팅 업무를 할 때 마스터 코치가 고문역할을 했고, 2003년 코칭협회가 설립되었다. 코치업무 후에 마스터 코치와의 인연으로 영성공부를 시작했고, 2005년 영성교육기업인 에너자이저를 설립했다. 마스터코치의 후배인 LG연수원의 원장부터 코치를 시작했다.

Q. 마스터코치, 스승을 만나다
 

에너자이저는 그 후 스피릿컬설팅으로 이름이 바뀌어 친동생인 김필수 대표가 이끌어가고 있고, 그는 참나코칭센터를 설립하여 활동하고 있다. 여기서 참나코칭센터에 대해 잠깐 설명한다.

참나 코칭은 한마디로 삶의 근본적인 치유이자 해결이다. 물질문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의학도 과학도 명백하게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참나는 진리이다. 인간은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물질에 삶의 근간을 두고 살아오다 보니 모든 것이 생각임에도 물질의식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왔다. 참나는 가장 바탕에 있는 무엇이다.

우리가 지하수를 팔 때 어느 곳은 얇게 파도 물이 나오고, 어떤 곳은 깊게 파야 물이 나온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파도 파도 물이 안 나올 때가 있다. 이처럼 해도 해도 안 될 때 바로 참나의 탐구를 통해 ‘물’을 얻을 수 있다. 그는 이야기한다. 현실을 바꾸지 못하면 코칭이 아니라고. 모든 것은 생각이며 뿌리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어느 정도, 어느 수준에서 만족할 수 있지만 궁극의 해결은 안된다.

그래서 참나 코칭은 근본적인 치유이자 해결, 깨달음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문제해결을 넘어선 궁극적인 행복과 구원에 대한 실제적 탐구가 가능하다고. 그래서 삶의 진짜 맛을 알 수 있기에 영성은 깨달음이다. 비록 종교적인 이미지로 오해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영성은 원초적이고 궁극적인 삶의 원천이다.

Q. 영원한 행복의 노래, 신의 한 수, 참나코칭센터 김한수 대표!
 

그가 중심이 되어 이끌어가는 참나코칭센터는 개인이나 기업, 공공기관 등의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더 나은 삶과 마음의 치유, 변화를 위한 전문코칭을 해 나가고 있다. 아울러 철저하게 진리로서 존재하고 진리를 바탕으로 즐거움을 표현하는, 내 안의 신성(불성)을 발현해가는 모임인 참나실현회를 통해 대중적 기반도 확대해 나가고 있다.

그의 발걸음이, 그의 삶으로 인해 많은 영혼들이 행복의 존재임을 자각하길, 그리고 진정한 구원이 되길, 그리고 동심원이 되어 온누리에 널리 퍼져나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아울러 좋은 인연이 되어 쭈욱 함께 해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참 행복에 발 맞추며...

 

(사)행복플랫폼 해피허브 대표/ 행복디자이너 김재은

세상 사람들에게 행복의 가치를 전하는 행복디자이너로서 행복을 이야기(강의)하고, 글을 쓰고(칼럼/책), 연결과 가꿈을 통해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과 소중한 가치를 만들어가고 있다. 2005년 4월부터 매주 ‘김재은의 행복한 월요편지’ 필자로 활동하면서 행복(幸福)은 행복(行福)임을 꾸준하게 제안하고 있다. 특히 사람이 희망이며 서로의 좋은 관계가 행복의 원천임을 함께 나누고자 2013년 3월부터 ‘김재은이 만난 사람/해피인터뷰’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소중한 인연들을 가꾸고 이어주고 있다. 매월 첫 번째 토요일, 행복한 사람들과 걷기 모임인 ‘행복한 발걸음 모임’을 3년 이상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김장욱 기자  together@lecture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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