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사춘기, 새로운 선택과 변화로 세상의 행복과 함께 하는 사람’

<사진=김재은의 행복한 월요편지 제공>

[한국강사신문 김재은 칼럼니스트] 자유는 내가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기본중의 기본, 결정적 증거가 아닐까 한다. 그 자유에 기초하여 삶이 시작되고 수많은 가치들이 만들어지고 인류역사의 발전이 이루어져 왔음은 자명하다. 나도 당신도 어느 누구도 그 자유를 꿈꾸며 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행복도 자유가 동행하지 않으면 날개 없는 새가 되지 않을까.

오늘 그 자유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 아니 지난 삶을 통해 자유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낀 사람을 만났다.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안진숙 정책위원이 바로 그 사람이다.

Q. 왜 자유를 꿈꾸었나?

60년대 중반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인 호남평야의 중심,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여름에 태어나 더위에 강하다는 말로 인터뷰의 포문을 열었다.

집안은 부유한 편이어서 어린 시절 여름엔 변산 해수욕장, 가을엔 내장산에 가족들이 함께 수박이며 치킨을 사가지고 소풍을 가기도 했다. 한번은 소풍을 갔다가 어린 그녀가 버스에 내리지 않은 채 있었다는 것을 몰라 온 가족이 그녀를 찾느라 법석을 떤 적도 있었다. 용인 자연농원에 다녀온 적도 있었다.

어머니는 여장부 스타일, 수리조합에 다니던 아버지는 다정다감 형이었다. 그녀가 아팠을 때 아버지가 바나나, 밀감 등을 너를 위해 사왔다며 가슴 품에서 꺼내주던 것도 기억 한 편에 자리하고 있다.

오빠와 언니가 있고 남동생이 있는 2남2녀 중 셋째였다. 누릴 수 있는 것을 다 누린 풍족한 생활을 했던 것 같다며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Q. 넉넉했지만 마음이 힘들었던 시절

오빠는 순종형이었고, 언니도 무난했지만 그녀는 시키는 대로 하기보다는 자기표현을 하는 저항적인(?)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그녀가 잘 할 수 있는데도 안한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중학교까지 김제에서 보내고 고등학교는 전주로 갔다. 공부를 잘 하지 못했지만 어머니는 ‘공부를 안 한다고’ 생각하고 다그쳤다. 김제에 살면서 1주에 두 번 이상 전주 자취집에 반찬을 가져다주면서 공부를 하라고 닦달했다. 너무 힘들었고 너무 싫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갔다. 하지만 대학에 가면서도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극성스런 어머니가 그녀와 상의 한마디 없이 대학입학원서를 접수했던 것이다. 딸이 대학에 떨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일어난 과잉행동이었다. 정말 어이가 없었지만 그 동안의 어머니 행동으로 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울먹였고 그녀의 눈망울에 이슬이 살짝 맺혔다. 순간 나에게서도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쨌거나 영문도 모른 채 전혀 모르는 대학과 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Q. 자존감 있는 사람, 부모와의 긴 갈등

대학 때 통금시간이 오후 9시여서 전주에서 김제 집까지 오려면 거의 저녁 일정을 포기해야 했다. 이렇듯 늦게 왔다고, MT갔다고 혼이 나기도 했다. 대학 때 언젠가는 머리 형태를 바꾸었다고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지금도 돌아보면 그녀의 태도에 문제 삼을 수는 있지만 성인이 된 딸을 그렇게 나무랄 일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위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억압하거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 그녀가 자라오면서 느낀 가장 큰 교훈이었다.

직장생활을 1년쯤 했을 때, 어머니가 남편을 정하는데도 중심역할을 했다. 어머니의 사촌동생이 남편의 형수와 같은 계원이었다. 그 형수 되는 분이 중간 다리를 놓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별로 재미가 없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고, 제대로 연애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막내에 일류대 약대를 나온 그 사람을 만나야 네 인생이 편하다며 어머니가 꼬드기는 바람에 어찌하지 못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국 결혼조차 그녀의 뜻과 상관없이 한 것이다. 딸을 위해 그랬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어머니의 선택에 따른 것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어머니가 정해 준 사람이든 아니든 빨리 결혼하여 어머니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게 결혼을 하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드디어 독립하나보다 하는 기대감을 가지면서 1987년 봄에 결혼을 했다. 그런데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으로 남편은 어머니로부터 바톤을 이어받는 계주선수 같았다. 아니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Q.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나다

결혼도 낯설고, 아이를 갖는 것도 낯 설은 데다가 연애도 제대로 못해보고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는지라 주변의 권유도 있고 해서 연애기간을 가진 후에 아이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의 고집을 어찌할 수 없었고 바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첫째 아이를 낳고 2년 뒤 둘째가 세상에 나왔다. 여전히 억압속의 울타리안의 삶은 계속되었다. 큰 아이가 5살 때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사회생활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신문에서 본 모 보험회사구인광고에 지원했다. 두 아이를 맡기고 연수를 받으러 가려고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다가 보기 좋게 거부당했다.

그래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고집을 부리자 남편은 아버지처럼 여기던 친정오빠까지 연락하여 그녀의 고집을 꺾으려 했다. 결국 오빠의 설득에 못 이겨 최초의 쿠데타는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나를 무시하는 남편의 태도에 난 안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 때의 좌절감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Q. 새로운 용기, 사춘기를 만들다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선언하고 다른 엄마들과 함께 하니 날아갈 듯 너무 좋았다. 그 동안 누군가에 억압받고 사는 게 너무 싫었는데, 이게 진정 자유라는 사실에 가슴이 북받쳤다. 지금까지 내 의지대로 산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에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계속 살면 내가 태어난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에 과감하게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자유선언 후 5년 정도 싸우며 살면서 끝내 수락을 안 하는 남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고, 39살의 사춘기는 그녀 스스로 놀랄 정도로 용광로처럼 타올랐다. 더 이상 저 남자에게 의지하고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일을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40이 다가온 나이에 취업을 할 수도 없었고, 생각해보니 미용실이나 옷가게 정도가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문득 책을 보다가 앞으로 노인인구가 많아진다는 내용에 순간 이와 관련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아이가 중학교에 막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한 사이버대학교에서 노인복지를 전공하려 편입을 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앞으로 돈을 벌고 일을 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공부를 하면서 노인복지시설에 가서 경험을 쌓았다.

그러다 노인복지시설 원장의 권유로 대학원에 진학하여 사회복지(복지행정)를 공부했다. 너무나 재미있었다. 그러다 평소 멘토로 모시던 분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를 소개해 주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인간의 존엄, 사회적 연대 그리고 사회정의가 최대한 실현되는 행복한 복지국가를 추구하는 단체이다. 복지국가운동을 하는 곳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이 단체에서 진행하는 아카데미를 수료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복지의 현실을 그대로 인식할 수 있었고, 그녀 자신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절감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자각하는 순간 신기하게도 행복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아! 이제 행복 시작이다.’

Q. 용기와 결단 있는 행동으로 얻은 행복

마흔 이전의 그녀의 삶에는 자신과 가족의 삶만 있었다면 그 후엔 거기에 세상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것도 큰 자리를 차지하며.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을 넘어서는 ‘더불어 함께 행복한’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함께 하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삶에서 기본적인 스케치는 마무리된 것 같다는 그녀이다. 이제 거기에 색깔을 칠하고 그리고 기꺼이 그런 삶을 즐기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이야기한다. ‘너희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해라’, ‘너의 인생의 캔버스에 너만의, 네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려라’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큰 아이에겐 사교육비를 엄청 쏟아 부었지만, 둘째 이후엔 그렇게 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지금도 아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깨어있어라. 사실은 그대로 그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는 지금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등기이사를 맡아 활동하고 있다. 지난 총선 때는 ‘복지국가당’의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그녀가 제 발로 찾아간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사회적 문제들을 연구하는 씽크탱크로 그녀는 정책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너무 좋다는 그녀의 말을 빌리면 안방마님이라고 했다.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선별적 복지는 기준이 모호하여 복지수혜자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그래서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북유럽식 복지국가를 지향하며 보육, 교육, 의료, 주거, 취업, 고용 등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에 매트릭스를 깔아주자는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적어도 인간적인 삶을 위한 매트릭스를 깔아주자는 것이다. 그것이 보편적인 인류애와 맞닿아 있다는 것,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혼자만이 아닌, 내 가족만이 아닌 우리 사회구성원이 함께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생각만으로는 부족하고 국가가 주도적으로 선순환의 제도를 만들어 역동적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함을 강조하는 그녀의 이야기에 힘이 느껴졌다.

Q. 사회복지전문가,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안진숙 정책위원!

김재은 대표(좌측)와 안진숙 정책위원(우측) <사진=김재은의 행복한 월요편지 제공>

새로운 사춘기를 거쳐 새롭게 태어난 그녀의 멋진 삶을 응원한다. 그녀의 자유로운 삶, 이를 선택한 큰 용기와 결단에 경의를 표한다. 그녀의 꿈, 진정 행복한 세상을 향한 여정에도 큰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거기에 동참할 멋진 인연에 마음이 설렌다.

삶은 기쁨이다. 행복이다. 그리고 새로운 무엇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온 말죽거리 양재동에 즐거운 바람이 분다. 그 속에 상큼한 그녀가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행복의 가치를 전하는 행복디자이너로서 행복을 이야기(강의)하고, 글을 쓰고(칼럼/책), 연결과 가꿈을 통해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과 소중한 가치를 만들어가고 있다. 2005년 4월부터 매주 ‘김재은의 행복한 월요편지’ 필자로 활동하면서 행복(幸福)은 행복(行福)임을 꾸준하게 제안하고 있다. 특히 사람이 희망이며 서로의 좋은 관계가 행복의 원천임을 함께 나누고자 2013년 3월부터 ‘김재은이 만난 사람/해피인터뷰’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소중한 인연들을 가꾸고 이어주고 있다. 매월 첫 번째 토요일, 행복한 사람들과 걷기 모임인 ‘행복한 발걸음 모임’을 3년 이상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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