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네이버 영화>

[한국강사신문 한상형 기자] 타계한 대한민국 대표 영화배우 신성일의 삶을 이야기하는 신성일이 집필한 『청춘은 맨발이다 : 신성일 Life Story(문학세계사, 2011)』를 소개한다.

엄앵란의 남편이기도 한 영화배우 신성일(81)은 2018년 11월 4일부로 생을 마감했으며, 세상을 떠나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에 참석하는 등 영화배우로서의 면모를 지켜왔다.

거침없이 맨발로 달려온 한국 영화계의 살아 있는 전설, 신성일의 에세이 『청춘은 맨발이다』. 이 책은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와 함께 한국의 문화예술 연대기, 한국의 영화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이래 6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한 시대를 움직인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스타인 저자는 이 책에서 스타의 은밀한 사생활을 들려주며 영화, 사회, 문화 쪽은 물론 정치, 권력의 어두운 구석까지 보여준다.

“한 시대를 움직인 최고의 스타이자 우리 현대사의 산 증인이 들려주는 리얼 스토리!”

거침없이 맨발로 달려온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스타, 우리 시대의 자유인 신성일! 그는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뒤 <맨발의 청춘> <초우> <만추> <안개> 등 506편의 영화에서 주연하며 60~70년대 청춘스타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상대역으로 출연한 여배우는 118명에 달한다. 단연코 한 시대를 움직인 최고의 무비 스타이자 우리 현대사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청춘은 맨발이다’라는 책의 제목처럼 신성일은 하루를 25시로 놓고 뛰어왔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집안이 풍비박산되어 빚쟁이들에게 주먹과 발길로 구타당한 신성일은 다시는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으리라 이를 악물고 무작정 상경(上京)하였지만 대입에서 잇따라 떨어지고, 방황은 계속됐다. 하지만 1960년대 초 그에게 최고의 영화배우가 되는 운명이 주어졌고, 한 해에 40~50편의 주연을 맡으면서도 무쇠 기계처럼 거침없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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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속에는 청춘스타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당대 최고의 여배우 엄앵란과 올린 세기의 결혼식, 성공일로의 영화계 생활과 그 후 정치 입문에 이은 수감생활 등 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흥미로운 신성일의 자전적 스토리가 담겨 있다. 또한 시비가 생기면 어떤 사람과도 한판 붙는 스타일인 그의 성격처럼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속 시원히 털어낸 한국 현대 문화, 정치계의 주요 인물과 사건들이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 그렇기에 『청춘은 맨발이다』는 그의 자서전인 동시에 ‘한국의 문화예술 연대기’며 ‘한국의 영화사’가 된다.

수십 년 발꿈치를 들고 뛰어다닌 신성일의 엄지발가락은 흉측하게 튀어나와 있다. “젊은놈들 하나도 안 무섭다”고 큰소리치는 그는 요즘도 매일 달리기와 아령으로 몸을 만들며 ‘무섭게’ 운동한다. 70대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과대포장되거나 과소평가되고 있는 인물이나 사건들에 대해서도 바로잡고자 했다. 또한 그는 이번 책을 통해 ‘인생은 혼자 걸어가는 것이다’, ‘정면으로 돌파하라’, ‘긍정적인 생각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라’는 메시지로 젊은 세대와도 소통하고자 했다.

특히 이 책을 통해 고 김영애와의 가슴 속에 간직한 사랑 이야기를 그녀의 사진과 함께 봉인하여 처음으로 공개하며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었다. “아무도 모르게 단 한 장의 사진을 간직해 왔다. 엄앵란도 모르는 미공개 사진이다. 약속대로 그 사진과 함께 <청춘은 맨발이다>(중앙일보, 일간스포츠 연재)에서 못다 한 김영애와의 사랑 이야기를 이번 단행본에 공개한다. 어떤 비난이 쏟아질지라도 두렵지 않다. 그 사랑을 있는 그대로 독자들에게 들려드리는 것이 내 의무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 그리고 사랑”

신성일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빚쟁이들을 피해 서울로 무작정 상경하여 생활하던 중 우연히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갔고, 신상옥 감독이 운영하던 ‘신필름’에 들어가 배우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때 신상옥 감독으로부터 ‘뉴스타 넘버 원’이란 뜻의 신성일(申星一)이란 예명을 받게 된다. 성은 신상옥 감독의 성인 신(申)을 썼다. 신성일이 하루아침에 탄생한 스타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지만 사실 험난한 밑바닥 생활부터 올라온 배우이다. 1960년 1월 1일에 개봉한 <로맨스 빠빠>가 히트했지만 그후 4, 5년 동안 별다른 작품에 출연을 못한 그는 사무실에서 바쁜 신 감독을 대신해 전화를 받았다. 그 덕분에 당대 유명한 영화계 인사며 영화담당 기자들과 친해졌고 그때 영화계에서 한자리 차지하는 데 필요한 인맥과 실무경험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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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영화배우 30년, 정치인 10년 세월 동안 그는 무수한 인물들과 인연을 맺으며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을 거침없이 가로질렀다. 1960~70년대 충무로에서 영화와 함께 청춘을 보냈고, 90년대 중반부터 약 10년간 정치인의 삶을 살았던 신성일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그간 겪어온 사건과 시대, 사람을 돌아보았다.

특히 엄앵란과의 만남에서부터 결혼과 별거 그리고 단란했던 이태원 시절의 이야기들이 상세히 기술된다. 1963년 늦가을 경기도 가평군 청평호에서 영화 <배신> 촬영장에서의 키스 사건과 자신이 더 다친 줄도 모르고 부상당한 엄앵란을 병원까지 호송했던 사건으로 신성일은 한 살 연상인 엄앵란의 마음속에 확실한 ‘남자’로 각인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어머니가 찍은 며느릿감은 재일동포 여배우 공미도리였다. 신성일 모르게 양가 부모 사이에 혼담이 오가기도 했다. 하지만 공미도리보다 엄앵란과의 인연이 더 강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결국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3,500여 명의 하객들이 워커힐 퍼시픽 홀을 덮쳐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 앙드레 김이 정성스럽게 지어준 웨딩드레스는 짓밟히고, 화환은 넘어지는 등 난장판 결혼식이 되었다.

이태원 181번지는 신성일, 엄앵란의 보금자리일 뿐더러 영화 관계자들이 좋아하는 장소가 되어 항상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또한 그 집은 귀한 선물을 주었는데 그들의 세 아이 모두 그 집에서 태어났다. 큰딸 강경아(1965년생), 아들 강석현(1967년생), 작은딸 강수화(1970년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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