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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을 통해 돌아본 인재(人材)의 중요성
<사진=위키백과>

[한국강사신문 윤상모 칼럼니스트] 「홍길동전」은 허균의 대표적인 한글소설이다. 탐관오리들에게서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준 홍길동은 조선시대의 어벤져스였다. 홍길동은 부도덕한 양반들과 탐관오리들을 혼내주며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을 이야기로나마 위로해준 영웅이었다. 당연히 「홍길동전」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허균 <사진=위키백과>

허균의 「홍길동전」은 조선시대 광해군 때 벌어졌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광해군 5년인 1613년 조령(문경새재) 길목에서 도적들이 행상인을 죽이고 은화 수 백 냥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다. 관원들에 의해 곧바로 7명의 도적들이 체포되었다. 도적들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진다. 도적의 무리 중 한 명이 “우리는 천한 도적들이 아니다. 우리는 양반의 자재들로서 은화를 모아 무사들과 결탁한 다음 반역하려 하였다”고 실토한 것이다.

그들은 모두 양반의 자식들이었으나 서얼 출신이었다. 일명 “칠서지옥(七庶之獄)”사건. 7명의 서얼들이 옥에 갇힌 사건이었다. 서얼은 정실 부인이 낳은 자식이 아닌 경우를 말한다. 즉, 첩의 자식중 양반과 양민(양반, 중인, 상민)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서자(庶子)라 하고 양반과 천민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얼자(孼子)라고 불렸다. 서얼은 서자와 얼자를 합쳐 부르는 말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서얼에 대한 차별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조선 건국에 일조한 사대부들은 성리학의 이념을 내세우며 철저하게 서얼을 차별하였다. 사대부들은 순수 양반이 나라를 지배해야 한다는 ‘순혈주의(純血主意)’에 집착했다. 조선 태종 때 공식적으로 서얼의 관직 등용을 제한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과거시험은 물론 생원시, 진사시에도 응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니, 아무리 공부를 하고 무예를 연마하여도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다. 이런 사회적 현실에 분노한 7명의 서얼들이 반란을 도모했으나 실패한 사건이 ‘칠서지옥’ 사건이었다.

광해군 때 고위 관료였던 허균은 이 사건을 보며 훌륭한 인재가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뜻을 펼치지 못하는 조선 사회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선은 어머니가 천한 출신이고 개가한 자손은 모두 관직에 나갈 수가 없다. 인재 등용을 막으면서 인재가 없다고 하니 남쪽으로 가면서 수레를 북쪽으로 돌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가 평소에 「홍길동전」 하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길동”을 제일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탐관오리들을 혼내주는 의적 홍길동의 활약상에 즐거워한다. 그러나 「홍길동전」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얼 출신으로 관직에 나가지 못하는 길동의 한이 숨어있다. 이런 길동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는 아버지 홍대감의 심정이 작품 초반에 잘 나타나 있다. 홍대감의 애뜻한 심정은 허균의 생각과 일치한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길동이 여덟 살이 되니 누구보다 총명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고 백을 헤아리니 세상 물정을 가려보는 품이 한다하는 어른들도 따르지 못할 만큼이었다. 이런 아들이지만 재주를 타고났어도 천한 첩의 아들일 뿐 홍씨 집안을 빛내 주기는커녕 제 몸의 영달도 이루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 「홍길동전」 허균, 도서출판 보리

의적으로 명성을 날리며 신출귀몰하던 홍길동은 임금에게 청을 한다. 자신을 병조판서로 임명해 주면 도적질을 멈추고 도적의 무리들과 함께 조선을 떠나겠다고 말한다. 결국 임금은 길동의 청을 받아들여 홍길동을 병조판서에 임명하게 된다. 길동은 화려한 판서행렬을 마친 후 도적의 무리를 이끌고 무인도로 들어간다. 이후 ‘율도국’이라는 이상국가를 세우고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된다. 홍길동은 도적질로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를 지적하는 동시에 자신이 출신 때문에 가로막혔던 관직 진출의 벽도 넘어 섰다.

「홍길동전」을 통해 훌륭한 인재가 서얼이라는 이유로 관직에 나가지 못하는 사회적 모순이 부각되자 서얼차별 철폐를 호소하는 상소문이 줄지어 임금에게 올라갔다. 영조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서얼에게 관직의 문을 개방하는 법이 반포되었다. 다음 왕인 정조는 유능한 서얼 출신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었다. 정조의 이러한 정책으로 많은 서얼 출신들이 관리로 발탁이 되었고 이들은 청의 선진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北學)파를 형성하게 된다.

서양의 역사에서도 출신에 대한 차별 여부에 따라 나라가 흥하고 망하게 되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아테네는 부모가 모두 아테네 시민일 경우에만 시민권이 주어졌다. 아테네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과 노예들은 아테네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고 전쟁이 일어나 아테네가 위험해져도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아테네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반면 로마는 제국이 확장되고 영토가 넓어질때마다 정복지의 사람들에게도 일정 자격을 갖추면 시민권을 부여했다. 노예 중에서도 뛰어난 인재가 있다면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타 민족에 대한 개방 정책을 취한 로마는 최초로 제국을 이루게 된다. 이민족이었던 그리스의 문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정복지 사람들을 로마의 시민으로 받아 들임으로써 ‘그리스로마 문화’라는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된다.

청나라는 10만의 군사로 1억 명의 명나라를 무너뜨렸다. 청은 만주족을 오랑캐로 생각하던 명의 지식 계층을 청의 우호세력으로 만드는 것이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시급한 과제라고 판단했다. 과거제도를 부활하여 지식층의 신분 상승 기회를 제공했다. 과거와 별도로 박학홍사과(博學鴻詞科)라는 시험을 실시하여 학자들을 포섭했다. 시행 초기에는 대부분의 선비들과 학자들이 시험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청의 황제가 직접 나서서 만 여명의 선비들을 모아 청의 포용 정책을 설명했다. 명 시대 황제의 얼굴조차 보기도 힘들었던 일반 선비와 학자들은 청 황제의 노력에 감동하여 줄지어 청의 관료로 진출했다.

박지원 <사진=위키미더어 커먼스>

청은 명나라가 폐지시킨 정치 비판의 중심지, 한림원도 재건했다. 청 왕조가 자신들이 지배층이라는 이유로 모든 요직을 독식하고 한족을 배척하고 억압했다면 또 다른 반란의 빌미를 만들어 줬을 수도 있다. 명의 문화와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계승 발전시킨 청나라를 다녀온 연암 박지원은 더욱 비판적인 자세로 조선시대 양반들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노론 벽파라는 지배층 가문에서 태어난 박지원은 아웃사이더로 천대 받던 서얼 출신의 선비들과 친구 이상의 친분을 평생토록 나누며 북학파의 리더가 되었다. 한 나라가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대가 아무리 오랑캐라 하여도 그들의 장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박지원이 생각하는 조선이 나가야 할 방향이었다.

이탁오 <사진=위키미더어 커먼스>

중국 명대 양명학의 대가였던 이탁오는 이렇게 말했다 “스승이라도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친구라도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박지원은 서얼 출신 박제가의 스승이었지만 친구처럼 격의 없이 술을 나누었고 역시 서얼 출신의 친구 이덕무, 유득공 등을 스승 이상으로 존경하였고 그들을 배우고자 노력했다.

지금의 한국 사회도 특정 분야에서 특정 학교의 출신들이 요직을 점하고 있다는 기사를 일상으로 접하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특정 지역의 출신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 들이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하지만 잘못된 관행이 반복되는 한 그 국가는 영원히 발전할 수 없다. 4백 년 전 홍길동으로 대표되는 신분 차별의 잘못된 관행이 오늘날 학교, 지역, 성차별의 모습으로 반복되고 있는 건 아닌지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윤상모 칼럼니스트  hp132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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