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는 엄마 vs 끝내주는 엄마’ 김영희의 육아일기 ③

[한국강사신문 김영희 칼럼니스트] “교감”

아기는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먹고 자란다. 의탁기관만이 최선이 아니다. 해당 기관에서 하루에 몇 번 간식을 챙겨주고, 몇 번의 학습과 몇 시까지 아이를 돌봐준다는 조항은 있을지언정, 아이에게 얼마만큼 애정을 쏟는가에 대한 항목은 없다. 아니, 애당초 케어 불가능한 사항이다.

물론 바쁜 현대 사회에서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며 사회생활하고 있다. 때문에 보육기관에 아이를 맡기는 것은 싫고 좋고를 떠나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런 경우는 부모가 아이를 보살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걸 안다. 아이 입장에서 보면, 부모가 회사에서 보내는 긴 시간 동안 부모의 사랑에서 잠시 멀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간극을 매우기 위해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더 밀도 있게 보낼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부모 입장에서는 훨씬 더 가혹해졌다. 사회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몰고 오는 압박감과 업무 스트레스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아이를 생각하면 집에서 역시 그만큼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앞서 출산 과정에서 얘기했듯이 우리는 좀 더 아이 입장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자식을 낳는 행위만은 아니다. 아이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헌신이라고 쓰긴 했지만 거창한 것은 아니다. 아이와 열심히 놀아주고, 책을 읽어주고, 함께 밥을 먹으며 대화하는 등 일상적인 것을 말한다.

승우는 다행히 온종일 먹고 자고 싸며 잘 지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은 한 달여 동안 아이 머리 위쪽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는 점이다. 출산 시 삐죽이 나온 머리 윗부분을 의사가 계속 만지작거렸기 때문이다. 괜히 애잔한 마음에 아이 볼을 비비곤 했다. 초보 엄마시절 승우가 칭얼대면 그 의미를 몰라 한참 헤매곤 했다. 시간이 지나서야 서서히 몇 가지에 대해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모유 량이 모자랄 때 특히 칭얼댔다. 승우가 먹지 않을 때엔 젖이 아깝게 흐르고, 정작 먹이려면 젖이 잘 나오지 않았다. 흔히 물젖이라 한다. 방법을 조금 바꿨다. 분유와 혼합식을 해보기로 했다. 다행히 그 후부터는 배가 부른지 흡족해 했다.

“수 없이 넘어져야 걸음마 배워”

아이가 걷기 위해선 수 천 번에 가까운 연습이 필요하다. 대부분 부모는 아이를 보행기에 태워 넘어지지 않게 하려고 한다. 하지만 넘어져 보기도 하고 그에 따른 고통을 느껴 보는 것도 아이에게 있어 중요한 경험이다.

그 게 왜 중요하냐면, 결국 자신에게 해가 되는 행동양식에 대해 아이 스스로 학습할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걸 아이가 인지하게 되면, 그 시점부터는 스스로 알아서 위험한 일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아이의 자립심에도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다. 소위 말하는 ‘나쁜 경험’을 사전에 근절시키기 위해 부모가 대신 해주는 행동들이 쌓이면 결국 아이의 자립에 나쁜 영향을 준다. 아이가 큰 이후에도 그러한 영향이 없다고 볼 순 없다. 자신이 기존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시련이 닥쳐오면 쉽게 좌절하고 어쩔 줄 몰라 한다. 온실 속의 화초로 크게 된다면 병약할 수밖에 없다.

보행기 태우는 행위를 대표로 들어 말했지만, 그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적절히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유모차는 아이가 걸음마를 뗀 다음에 경험하게 해도 늦지 않다. 즉, 부모가 아이에게 해주는 케어의 정도는 아이가 이미 특정 경험을 성취한 후에 이를 보조해주는 기능에서 머물러야 한다. 아이스스로의 성취가 우선이다. 실수를 두려워 말고 열심히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게 두뇌 자극에도 좋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꼭 그 경험의 성격이 긍정적일 필요는 없다. 어릴 때의 좋고 나쁜 경험들이 쌓여 결국엔 인생의 자양분이 된다. 아이의 안위에 해가 되지 않는 한도 내라면 얼마든지 좋다.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은 부모가 해줄 수 있는 배려중 하나다.

※ 참고자료 : 김영희의 『끝내는 엄마 vs 끝내주는 엄마(가나북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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