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을 이기는 리더십⑪

[한국강사신문 윤상모 칼럼니스트] 신은 언제나 칭기스칸을 순탄한 길로 안내하지 않았다. 메르키트 족에 붙잡혔다가 돌아온 칭기스칸의 아내 부르테는 홀몸이 아니었다. 부르테는 부족으로 돌아온 후 아홉 달 뒤에 사내아이를 낳았다. 몽골의 대표적인 역사서인 「몽골비사」는 그 사내아이가 누구의 아들인지 정확하게 기술하지 않고 있다. 칭기스칸이 그 아이의 이름을 ‘방문객’ 또는 ‘손님’이라는 뜻의 주치라고 지어준 것으로 보아, 자신의 아이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주치가 자신의 합법적인 장자라고 천명했다.

몽골의 부족들은 가족 중심의 씨족 사회가 주를 이루었다. 몽골의 전통은 부족의 귀족들과 군대의 지휘자로 구성된 ‘쿠릴타이’에서 부족을 이끌어갈 차기 칸을 정한다. 칸이 차기 칸의 후보를 지명하면 ‘쿠릴타이’는 만장일치의 합의를 볼 때까지 후보를 검증한다. 차기 칸이 될 후보의 혈통은 중요한 요건이었다. 비록 칸이 되지 않더라도 칸의 다른 형제들은 군대를 지휘할 장군이 된다. 만약 장군이 된 형제가 칸의 혈통이 아니라면 씨족으로 구성된 부대원에 대한 지휘는 힘들어 질 수 밖에 없다. 그러한 몽골 사회의 구조를 칭기스칸이 모를 리 없었다. 아내가 낳은 아들이 자신의 피가 아니라는 이유로 아이를 버린다면 그 아이는 분명 ‘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또 한 명의 테무진(칭기스칸의 어릴적 이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칭기스칸은 원한은 복수를 낳고 그 복수로 인해 또 다른 원한이 반복되는 몽골 부족의 악순환을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치는 칭기스칸의 장남으로 인정받았고 칭기스칸의 혹독한 가르침을 통해 동유럽을 정복한 전사들을 이끈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칭기스칸의 부인은 500명이 넘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칭기스칸은 몽골 부족들을 통일하고 나아가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35개가 넘는 나라들을 정복했다. 정복하는 과정에서 족장과 술탄, 왕과 유력한 가문의 아내나 딸을 부인으로 맞는 것은 상대 부족이나 국가를 책임진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또한 정복한 대륙 전체를 일체화 하는 안전 장치였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했을 때 수십 명의 지방 호족의 딸과 혼인한 이유도 비슷한 목적이었다.

칭기스칸은 후계구도 만큼은 철저하게 본처인 부르테가 낳은 자식들에게만 영토를 나누어 주었다. 자칫 첩의 자식들에게까지 권력을 나누어 주어 형제끼리의 전쟁으로 인해 제국이 무너지는 우를 범하기 않기 위해서였다. 물론 칭기스칸의 사후 부르테가 낳은 자식 간에 칸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은 있었다. 하지만 제국은 150년 이상 유지되었고 손자인 쿠빌라이 대에 가서는 300년 간 중원의 지배자였던 송나라를 무너뜨리고 원나라를 건국하기에 이른다.

몽골제국 영토 <사진=티칭백과>

칭기스칸은 정복을 마무리할 무렵 제국을 다스릴 차기 칸으로 셋째인 오고타이를 후보로 지명한다. 칭기스칸은 정복 전쟁이 끝난 이후를 준비했다. 거대한 제국을 안정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싸움밖에 모르는 전사보다는 실전 경험은 부족하지만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정치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칭기스칸을 연구한 학자들은 만약 주치가 풍부한 실전 경험에다 정치적인 지도력까지 겸비했다면 칭기스칸은 망설임 없이 주치를 차기 칸으로 지명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칭기스칸은 보르지긴의 족장 그리고 몽골의 칸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칭기스칸은 아들 4형제에게 어릴적부터 이렇게 말했다. “몽골에서 어느 방향으로 말을 타고 가더라도 1년이 걸리는 곳을 너희들에게 물려줄 것이다.” 칭기스칸은 자신의 원대한 포부대로 꿈을 이루었고 네 명의 아들에게 제국을 물려주었다.

칭기스칸 가계도 및 역대 칸 <사진=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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