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강사신문 이미숙 기자]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윤성용)은 『목욕탕: 목욕으로 보는 한국의 생활문화』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의 근현대 생활문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자료를 수집하고자 2011년부터 성냥공장, 간판화가, 시계수리공 등 공간과 직업을 조사하고 있다. 2018년과 2019년에는 ‘보건’과 ‘위생’이라는 주제어로 근현대 한국 사람들의 생활문화를 조망하기 위해 ‘목욕탕’ 조사를 시작하였다.

『목욕탕: 목욕에 대한 한국의 생활문화』 조사보고서 <사진=국립민속박물관>

<건국신화만큼 오래된 목욕 이야기> 몸을 씻는 행위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관찰되는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다. 그러나 그것에 의미를 부과하고 문화로 발달시킨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한국에서 목욕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로부터 시작한다. 신라 효소왕(孝昭王) 죽지랑(竹旨朗)편에는 관념적 더러움을 씻어내는 의례로서의 목욕이 등장한다. 명령을 어기고 도망간 익선이라는 자를 대신하여 맏아들을 잡아와 한겨울 추운 날 성안의 연못에서 목욕을 시켰다고 한다. 여기서 씻어낸 것은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한 관념적 오염으로 목욕을 함으로써 죄를 씻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을 알 수 있다. 목욕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알영의 탄생설화에서도, 미륵존상이 된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에서도 등장한다. 고려사절요에는 왕이 목욕을 하는데 한 달 동안 사용한 재료의 양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충숙왕(忠肅王, 1294~1339)은 깨끗함을 좋아하여 여러 가지 향료를 한 달 동안 10여 항아리, 수건으로 사용하는 저포를 60여 필이나 사용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목욕: 몸 씻는 도구만 여러 가지> 고려시대의 목욕은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여름에 날마다 두 번씩 목욕을 시내 가운데에서 한다. 남자와 여자가 분별없이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굽이 따라 몸을 벌거벗되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기록할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목욕방식은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은밀한 것으로 바뀐다. 단오나 유두절, 복날 등 계곡에서 물맞이를 하는 날을 제외하고 목욕은 남이 보지 않는 시간과 장소에서 행하는 행사가 되었다. 전신을 물에 담가 목욕하기보다 더러워진 신체 일부를 닦아내는 부분욕을 행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 사용하였던 목욕용구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대야이다. 대야는 얼굴, 손, 발 등 부분욕을 할 때 사용하였던 것으로 손 씻는 대야, 얼굴 씻는 대야, 발 씻는 대야 등이 따로 있었다.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몸 씻는 여러 도구가 기록되어 있는데 동으로 만든 대야, 사기로 만든 대야, 질그릇 대야, 나무대야, 가죽대야를 비롯하여 세숫대야 깔개, 세수치마, 목욕통 등이 등장한다.

<콜레라의 유행과 목욕탕의 등장> 대중목욕탕이 없던 사회에 그 필요성이 부각된 계기는 19세기 초반부터 꾸준하게 등장한 콜레라의 유행이었다. 1821년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콜레라로 인하여 수십만 명이 사망하였다. 무더운 여름을 보낸 해에는 더욱 콜레라가 기승을 부렸다. 콜레라의 원인이 세균이라는 병인체론(病因體論)을 접한 지식인들은 세균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하여 깨끗이 씻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독립신문에서는 1896년 5월 19일과 6월 27일 기사에서 콜레라 등의 유행병을 막기 위해 도성 안에 큰 목욕탕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목욕할 것을 주장하였다.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목욕탕> 1897년 1월 14일 독립신문에는 북청 출신 강학기라는 사람이 일본사람이 운영하는 수표교 목욕탕에서 소변을 보아 벌금을 문 기사가 실려 있다. 20세기도 되기 전에 이미 일본인이 서울 청계천변에 목욕탕을 개설하여 운영하였으며 한국인들도 그곳을 이용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00년대를 넘어서면서 목욕탕과 그 시설을 홍보하는 광고가 자주 등장한다. 1901년 8월 27일과 1903년 12월 5일 횡성신문에는 무교동에 위치한 취향관이라는 목욕탕의 광고가 게재되었다. 취향관은 목욕탕을 수리하고 새로 한증막을 지었으며 목욕과 동시에 내외국 요리를 제공하였음을 알린다. 1904년 9월 7일 제국신문에서도 ‘혜천’이라는 목욕탕에서 신선한 과자와 향기로운 각종 술을 준비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런 까닭에 1934년 9월 12일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20여 년 전 목욕탕에 가는 사람은 바람난 사람으로 인정하였으므로 목욕탕에나 좀 가려면 몰래몰래 숨어’다녔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중도덕 부족 또는 차별> 1920년대를 넘어서면서 서울 안에는 대중목욕탕의 수가 점차 증가한다. 이와 함께 목욕탕을 이용할 때에 주의해야 할 사항을 알리는 신문기사가 등장한다. 온탕에 처음 들어갈 때에 바로 들어가지 말고 몸을 씻고 들어갈 것, 탕 속에서 때를 씻지 말 것, 어린아이들이 탕 속의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할 것 등의 내용은 현재 대중목욕탕을 이용할 때의 주의사항과 동일하다. 그러나 대중목욕탕에서는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별이 나타나기도 한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목욕탕에 한국인을 들이지 않는다거나 심지어 목욕 중인 사람을 폭행하였다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으며, 전주에서는 한국인을 들일 수 없다는 일본인과 패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차별을 피하는 방안으로 한국인들이 직접 대중목욕탕을 개업하여 경영하기도 하였다.

<대중목욕탕의 정착: 도시화와 새마을운동> 대중목욕탕의 전국적인 증가는 한국의 급격한 도시화‧산업화, 새마을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로의 인구집중은 각종 도시문제를 유발하였으며, 부족한 위생시설 역시 그 문제 중 하나였다. 서울시는 일본인이 남기고 간 목욕탕을 귀속시켜 운영하기로 발표하여 도시사람들의 보건과 위생증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였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 대중목욕탕의 수는 전국적으로 증가하였으며, 서울 등 도시에 더욱 많은 대중목욕탕이 개업하였다. 한편 농촌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 국제협력처의 원조를 받거나 새마을운동의 전개로 마을단위로 마련된 공동기금을 기반으로 목욕탕을 건설하였다.

서울시 서대문구 아현동에는 1959년에 개업한 목욕탕, ‘행화탕’의 건물이 아직 남아 있다. 2008년에 문을 닫은 이 목욕탕은 영업당시 매표소, 남녀 탈의실, 여탕, 남탕 그리고 각각의 탕에 딸린 사우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남탕과 여탕의 천장이 서로 뚫려 있어서 여탕에서 세신사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남탕까지 들렸다고 한다. 남자 탈의실에 이발사와 이발의자가 있는 것이 여자 탈의실과 다른 특징이다.

<때를 미는 독특한 문화> 대중목욕탕에서 이용객의 때를 밀어주는 직업은 현재 형태의 대중목욕탕이 정착된 이후에 발생하였다고 하나 언제부터 직업이 되었는지, 어떠한 연유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1970년 10월 28일 경향신문 기사에 세운상가의 남성사우나탕에서 일하는 ‘때밀이’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여탕보다 남탕에서 먼저 때를 밀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직업은 초기에는 ‘때밀이’라고 불렸으나 1993년 통계청에서 표준직업을 개정하면서 욕실종사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현재 일상생활에서는 세신사, 때밀이, 나라시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1968년 6월 26일 매일경제 특허등록 기사를 보면 목욕용 접찰장갑이라는 이름으로 때를 밀 때 사용하는 ‘이태리타올’이 기록되어 있다. 부산에서 직물공장을 운영하던 김필곤이라는 사람이 비스코스 레이온 소재를 꼬아서 만들었는데 국내산 원단에 이탈리아산 실 꼬는 기계인 연사기와 염료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름이 이태리타올이 되었다고 하는 등 기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 이후 이태리타올은 한국의 목욕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필수품목이 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등을 밀기 어려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자동 등밀이 기계가 발명되었다.

<아파트의 건설과 목욕문화의 변화> 대중목욕탕의 수는 아파트의 보편화와 함께 감소하기 시작한다. 유사한 평면도를 기반으로 대량 보급된 아파트는 사람들의 생활양식에도 변화를 주었다. 상하수도의 보급과 수세식 설비 그리고 욕실과 화장실이 공존하는 배스유닛(bathunit)형 욕실의 보급으로 인하여 전신목욕은 집 안에서도 가능한 일이 되었다. 따라서 대중목욕탕의 방문 횟수는 점차 감소하였다. 2018년을 기준으로 공중위생법상 목욕업으로 등록된 업소의 수는 전국적으로 총 6,911개소다. 대중목욕탕뿐만 아니라 특급호텔의 사우나부터 시작하여 24시간 찜질방 등 대형 사우나도 모두 포함한 통계자료로 일반적인 대중목욕탕으로 한정할 경우 그 수는 더욱 줄어든다. 목욕업의 수는 1990년 후반부터 감소하기 시작하여 20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3,000여 곳이 문을 닫았다. 앞으로 목욕업의 수는 더욱 가파르게 줄어들 수도 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대중목욕탕의 모습을 그대로 기억해 두는 것도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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