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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강사신문 김재은 칼럼니스트] 사랑은 주는 것일까? 받는 것일까?

어머니의 사랑이라면 거의 무조건 주는 쪽에 가까울 것이고, 욕심 많은 깍쟁이라면 아마도 받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진짜 사랑은 대가없이 주는 것이기에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것, 또는 받으려고만 하는 것은 굳이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인가 사랑이 거래의 대상이 되고, 내 것을 챙기려는 마음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데 사용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리는 사랑조차도 주고받는 대상이 되어버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하지만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아야 하는 ‘대가있는 무엇’이 사람 사는 세상을 각박하게 하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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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사랑타령을 한 것은 세상의 이치 하나를 이야기하고 싶어서이다. 살다보면 인생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비빔밥이라는 것, 아니 희(喜)와 락(樂)보다는 노(怒)와 애(哀)가 훨씬 많고 크게 느껴질 것이다. 때로는 과연 내 인생에 희(喜)와 락(樂)이 있기나 한 것일까 하며 절망하고 낙담하며 사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조건이나 상황 또는 관계가 내 마음처럼 되지 않기에 당연히 그럴 수도 있을 거라 여겨진다. 여기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가 작은 기쁨과 즐거움을 놓치고 사는 것도 많기에 일상의 삶을 돌아보면 희(喜)와 락(樂)보다는 노(怒)와 애(哀)가 많다는 것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또한 노(怒)와 애(哀)가 희(喜)와 락(樂)보다 많고 크다고 해서 힘들어하고 고통스럽게 살 것도 아니다. 쇠귀 신영복 선생은 이야기한다. 큰 슬픔을 견디기 위해서 반드시 그만한 크기의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때로는 작은 기쁨 하나가 천개의 슬픔을 견디게 한다고. 진정 기쁨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공감할 것이다. 작은 기쁨 하나, 작은 사랑 한 조각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당장 내 삶으로 돌아와 살펴보면 자식과 배우자 등 가족 관계에서 쉽게 느껴질 것이다. 마음에 안 드는 것 열 개에 마음에 드는 것 하나, 그것이 현실이며 마음에 드는 그 ‘하나’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수많은 고통 속에 나를 미소 짓게 하는 순간 하나가 나를 견디게 하는 것이다.

삶이란 게 그렇다. 일상의 작은 기쁨 하나가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그런데 내 주변을 살펴보면 일상의 작은 기쁨은 얼마든지 있다. 여기저기 곳곳에 널려있다. 단지 내가 관심을 가지고 찾을 때만 보일 것이다. 아니 내가 이렇게 살아있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쁨이요 즐거움인지도 모른다.

주문을 외운다. ‘내가 그대로 기쁨이요 즐거움이요 행복이다’라고. ‘시시각각 몰려오는 슬픔과 분노, 화와 짜증을 일상의 작은 기쁨 하나로 단번에 물리칠 수 있다‘고. 작은 기쁨 하나가 큰 슬픔을 견디게 한다.

※ 참고자료 : 교차로 신문 ‘아름다운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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