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 고조선연구소 허우범 연구원 <사진 출처=인하대학교>

[한국강사신문 한상형 기자] 인하대학교(총장 조명우)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위화도가 고려 말 이성계가 회군한 위화도가 아니라는 연구 성과가 나왔다고 지난 5일 밝혔다.

아울러 인하대는 위화도 회군의 원인이 되었던 명 태조의 철령위 설치 장소가 한반도가 아닌 요동이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를 공개했다. 이 두 주장은 백여 년 넘게 이어온 학계의 통설을 흔들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주인공은 인하대(총장 조명우) 융합고고학과에서 올 8월에 박사학위를 받는 허우범씨. 그의 초기 연구는 이미 공인학술지인 『인문과학연구』에 출판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일으켰다고 한다.

위화도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출발점이 되었던 역사적인 장소다. 지금까지 위화도는 중국 단동시 앞 압록강 가운데 있는 섬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는 일제가 우리의 역사를 한반도 안으로 몰아넣은 역사왜곡의 결과라는 것그의 주장이다. 허 박사는 당대 사서에서 압록강 가운데가 아니라 강을 건너서 위화도에 진을 쳤다는 기록에 의문을 품고 관련 사서들을 뒤졌다. 그 결과 조선시대 4백여 년간 160건이 넘는 위화도 관련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이들 자료 중에는 위화도의 위치와 면적, 모습과 특징들을 알려주는 구체적인 데이터들이 포함되어 있다. 허 박사는 사서에 기록된 위화도의 특징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 위화도는 섬이 아닌 ‘강변의 땅(江邊之地)’이다. 보통 사방이 물로 에워싼 육지를 섬이라고 생각하지만 과거에 섬(島)에 대한 인식은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곳도 섬이라고 불렀다. 즉, 하회마을처럼 강물이 휘돌아나가는 지역도 섬이라고 했다.

둘째, 기록에 위화도에는 '태조봉'이라는 산봉우리가 있고, '회군천'이라는 개천도 있다. 조선을 건국한 발상지이기에 기념비도 세웠고 익원당이라는 건축물도 지었다. 건축물과 비석 등은 사라질 수 있지만 산봉우리는 사라질 수 없다. 압록강에 위화도로 알려진 곳에는 산봉우리가 없으므로 위화도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셋째, 조선시대 최고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의 위화도 설명을 주목했다. 이 자료에 위화도에는 세 개의 강줄기가 흐르는데 이는 압록강의 지류이며, 이름도 ‘굴포(掘浦)’라고 명시했다. 또한, 위화도는 배나 뗏목이 아닌 사람들이 직접 걸어서 갈 수 있으며, 강폭은 7-80보에 불과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 위화도는 현재 한중 국경의 압록강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현재의 위화도는 사서에 기록된 내용과 전혀 맞지 않는 곳이다. 우선 사서에 기록된 것과 달리 강변의 땅이 아닌 강 안의 섬, 즉 하중도(河中島)다. 압록강의 지류가 아닌 본류에 있으며, 땅의 모습도 퇴적층으로 이뤄진 평평한 땅으로 산봉우리는커녕 언덕도 없는 곳이다. 또한, 강폭도 넓고 연중 강물이 풍부하여 걸어서 갈 수가 없는 곳이다.

허 박사는 이러한 여러 내용을 검토하고 실증적 조사를 반복했다. 다양한 교차검증을 거쳐서 현재의 ‘중국 요녕성 관전만족자치현 서점자(徐店子)’지역이 이성계가 회군한 위화도임을 밝혀냈다. 이는 현재의 위화도에서 80여㎞ 북쪽에 위치한 곳이다. 그는 또 다른 명백한 증거도 제시했다. 우리 사료에 등장하는 검동도는 위화도와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있는 섬인데, 이곳은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을 배웅하고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을 영접했던 곳이다. 위화도 건너편 검동도로 비정되는 곳에는 지금도 영빈령(迎賓嶺)이라는 고개도 있다. 이처럼 서점자 지역이 위화도임을 부인할 수 없는 필요충분한 근거를 현장 답사를 통해 확보했음을 강조한다.

허 박사는 새롭게 밝힌 위화도의 위치와 함께 고려 말 우왕과 최영이 시도한 요동 정벌과 관련된 철령위의 위치도 밝혀냈다. 군사고고연구회장인 인하대 남창희 교수도 이성계 원정군이 요동을 항해 북진했는데 정작 분쟁의 불씨인 철령위가 강원도에 있다는 기존 학설은 군사학의 기초와 모순된다고 했다. 현재 중고교 교과서에 철령은 강원도 철령인 것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의 복기대 소장에 의하면 철령위의 위치를 찾는 열쇠는 한국, 중국의 공식 사료에 있다고 한다. 철령과 철령위 위치 문제는 명 태조가 70참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에 답이 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 관변학자들은 요동에서 강원도 철령까지 70참을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17참의 오기라고 왜곡했고 그 폐해가 오늘날까지 답습되고 있다고 한다. 허우범씨는 사서에 기록된 70참은 명 태조가 수도를 세운 남경에서 요양까지의 참(교통거점)의 수를 말한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문종실록』에서 명나라 사신의 여행루트 기록도 입증한다.

고조선연구소 허우범 연구원은 위화도와 철령이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이유가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왜곡에서 기원한다고 주장한다. 일제가 한국사를 반도사관의 틀에 맞추기 위해 사료 조작과 억지 해석을 감행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학계에서는 그 근원을 쓰다 소키치의 『조선역사지리』(1913)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번 연구로 위화도와 철령위 위치가 쓰다 소키치의 역사부도 작성 과정에서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작년에 사단법인 대한사랑과 협력하여 이러한 연구 결과를 전국 공개강연에서 소개하자 각계에서 폭발적인 호응이 있었다. 대한사랑 주최 시민행사에서 김삼열 독립유공자유족회장은 일제가 심어 놓은 식민사관이 지금도 답습되고 있다고 성토했다.

그의 학위논문 제목은 「여말선초의 서북 국경선 연구」인데 본격적인 국경선 연구로는 최초의 학위논문이라고 김연성 교수는 평가한다. 시민들의 높은 관심을 반영하여 이 연구 결과에 대한 공개토론회가 8월29일(토)에 서울 대한학술원에서 관련 전문가를 초청해서 개최될 예정이다. 논문 심사위원장을 맡은 남창희 교수는 허박사의 연구결과가 기존의 인식과 차이가 큰 만큼 소통과 치열한 논쟁을 통해 중세 한국 국경사의 진실에 접근하는 노력이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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