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리더의 세상 보는 법

[한국강사신문 염소연 칼럼니스트]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 중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만드는 능력’이다. 창조력이라고도 한다. 태초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어느 시점부터 사람을 비롯해 모든 것들이 새로 만들어져 왔다. 모든 사람은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창조력이 없이 만들어진 것은 없다. 특히 예술가들은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것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일을 도모한다. 모든 일이 그렇다.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새로운 문제점이 발견되고 그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창의력이 발휘된다.

창의력은 즉 필요에 의해 나온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의 뇌는 반짝 하고 열린다.

가끔 내가 SNS에 기록해 두었던 글들을 보면 ‘이런 글들을 썼었나? 싶을 때가 있다. 일상에 젖어 나 자신이 그 작은 공간과 시간에 침잠에 있을 때 내가 썼던 글을 보면 다시 깨어나는 기분이다. 불과 며칠 전에 썼던 글이지만 그 순간만큼 나는 그 주제에 골몰했고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썼다기보다는 내 마음이 썼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 개인 소장용으로 심심풀이로 쓴 글은 평범하다. 하지만 글을 읽어 줄 누군가를 염두에 두면 글에 날개가 달린다. 글이 스스로 치장한다.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때로는 힐링이, 영감이, 반성이 되기를 나 스스로 기대하게 된다. 그때 창의력이 발휘되고 창조가 일어난다. 쓰지 않으면 안 되고 쓰고 있지 않으면 심장이 두근거릴 때 그것은 나의 생존과 연결된다. 나의 정체성과 행복이 그곳에 매달려 있다.

모든 것은 일 또는 업과 관련된 활동일 경우에 인위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똑같은 음식을 맛보아도 보통은 맛있다. 맛없다. 짜다와 같이 표현될 것이 맛 칼럼니스트는 그와 관련한 다양한 표현을 찾고 연구한다. 그리고 다양한 해석을 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이 그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위해 더 먹고 더 맛본다. 그리고 그것을 팔기 위해 편집하고 자신의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 낸다. 브랜드다.

셀프리더는 남과 다른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느끼거나 또는 그러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see'는 의도 없이 단지 나에게 그저 보이는 것, 또는 보게 되는 것이고 'watch'는 의도적으로 필요에 의해 보는 것이다. 'see'는 '수동'의 보다이고, 'watch'는 '능동'의 보다가 된다.

의도적으로 바라보고 찍은 사진작가의 사진 한 장에는 작가의 생각, 경험, 가치관이 들어 있다. 그런 사진을 만난 우리는 또 우리의 생각, 경험, 가치관을 통해 그것을 바라본다. 사진 속에 담겨져 있는 얼굴에 진흙을 묻히고 있는 어린 아이의 웃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그 이면에 담겨진 작가의 의도와 감정, 생각은 보는 이에 따라 주관적이 될 것이다.

그렇게 사진 한 장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작품 속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너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만나는 장을 마련할 수 있다. 그것이 예술이 주는 '미(美)'일 것이다.

우리말로서의 ‘보다’라는 말의 어원도 ‘상세히 조사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작가가 그 이면까지 상세히 본 것을 사진을 통해 우리는 또 한 번 상세히 보게 되는 것이다. 상세히 보는 것의 깊이는 개인의 재량마다 다를 것이다.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바라볼 때 육안뿐만이 아니라 심안이 눈을 뜬다. 사물의 앞쪽이 아니라 뒤쪽도 바라본다. 앞쪽은 정해져 있지만 뒤쪽은 정해져 있지 않다. 정답이 없다. 우리가 상상한 그대로가 나에게 정답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세상이 정해 준 앞쪽의 답만을 보며 산다. 보여주는 대로 볼 뿐이다. 모든 것은 앞과 뒤, 위아래, 옆이 있다. 평평하다던 지구도 알고 보니 입체였다. 평범한 것 같은 누군가의 삶이 알고 보니 매우 특별했다. 인생도 사물도 입체인데 우리는 그것을 앞에서만 바라본다. 심안은 감고 육안만 뜨고 멀쩡히 산다.

앞쪽은 정해져 있지만 뒤쪽은 우리의 상상대로 생각대로 흘러간다. 상상하기 위해 창의력이 필요하다. 이미 정해져 있는 것에는 창의력이 필요 없다.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세계적인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대리석 상점에 있는 크기는 크지만 볼품없는 대리석 덩어리로 조각상 ‘피에타’를 만들어 냈다. 1년 뒤 미켈란젤로가 가지고 갔던 볼품없던 대리석 덩어리가 훌륭한 작품이 되어 있는 것을 본 상점 주인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단지 내가 보고 싶은 것 외에 불필요한 부분을 끌로 떼어냈을 뿐입니다.”

대리석 덩어리의 앞쪽은 크기만 커다란 볼품없는 돌덩어리다. 하지만 뒤쪽은 그 사람의 상상대로다. 앞쪽은 한계와 정해진 것, 편견, 프레임이지만 뒤쪽은 가능성과 재발견 그리고 혁신이다. 앞쪽은 가깝지만 내 것이 아니고 뒤쪽은 멀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창조할 수 있는 진정한 내 것이다.

개구리 두 마리가 크림 통에 빠졌다. 한 마리는 이제 죽은 목숨이라 하여 포기하고 이내 죽어 버렸지만 다른 한 마리는 크림 위에 떠 있기 위해 계속 몸부림을 쳐서 크림 속에 파묻히지 않았다. 개구리의 계속된 움직임으로 크림은 어느새 버터가 되어 굳었다. 개구리는 살 수 있었다. 크림 통에 빠진 것은 앞쪽이고 크림위에 떠 있어야겠다는 개구리의 몸부림은 뒤쪽이다.

상상하고 움직이는 자에게 기회와 운이 찾아온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낮은 학벌, 불우한 가정환경,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들은 단지 우리에게 보여 지는 앞면일 뿐이다. 자신의 인생을 다른 각도에서 SEE가 아닌 WATCH를 통해 재조망해야 한다. 보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보여 지는 것이 내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하는 것이 내 것이다.

마르셀 푸르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탐험은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 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여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눈은 육안이 아니라 마음의 눈 즉 심안일 것이다. 아무리 좋다하는 책을 수없이 읽어도 내 인생이 변하지 않는 것은 그것의 뒤쪽을 보는 것을 게을리 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은 뒤쪽에 달려있다. 뒤쪽은 내가 보고자 하는 그대로다. 통찰은 그 쪽에 있다. 당신은 당신의 인생에 무엇을 보고 싶은가. 보고자 하는 대로 상상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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