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서울시청>

[한국강사신문 정수인 칼럼니스트] 금빛 억새, 은백색의 갈대가 풍경에서 밀려나고 있다. 2018년 가을을 물들이는 색은 단연코 핑크가 으뜸인 까닭이다. 언제부턴지 들녘을 점령한 분홍빛의 물결은 이름하여 ‘핑크뮬리’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대표적인 한 사이트에서만 20여만 장의 인증사진이 검색된다고 하니 가히 대한민국의 가을은 분홍빛의 물결 속에 있다. 금빛, 은백색의 억새와 갈대가 아날로그 감성이라면 분홍빛 핑크뮬리는 디지털 감성으로 이 가을을 물들이고 있다.

핑크뮬리는 서양 억새다. 학명은 뮬렌 베르기아 카필라리스(Muhlen bergia capillaris)로 '모발 같은'이란 뜻을 가진 라틴어다. 아기의 머릿결 같은 분위기는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전 세계적으로 조경용으로도 인기가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몇 년 새 유명해졌다. 다년생 풀이라 해마다 심을 필요도 없다. 비용절감과 관리가 편한 것도 인기몰이의 한 비결이다. 그 동안 식재된 면적만 해도 총 11만4575㎡에 이른다하니 축구장(7140㎡) 넓이로 환산해보면 약 열 여섯 개 정도의 크기다.

한 여름까지는 녹색을 띄다가 가을로 접어들어 분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핑크뮬리의 생명력은 매우 강하다. 한번 뿌리를 내린 곳에서 해마다 싹을 틔우기 때문에 다른 작물을 새로 심으려면 독한 제초제를 뿌려야 한다. 다른 작물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풀, 특히 잡초의 특징이 아니던가. 그러나 빛의 방향과 채도에 따라 달라지는 핑크뮬리의 분홍색은 우리 신체의 극단적 힘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쫓기듯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특성 중의 하나가 만성 불안이다. 삭막한 도시의 경쟁구도에서 언제 뒤처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이미 친숙하다. 순간순간 예기치 않은 불안이 엄습하면 숨이 막히고 온 몸이 떨리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에 의해 중재될 수 있다는 보고가 있다. 신체와 뇌에서 분비되는 화학물질인 노르에피네프린은 공격성을 유발하는 특정 호르몬을 억제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색채심리학에서 분홍색은 휴식과 동시에 치유의 색으로 여겨진다. 1950년대, 미국의 생태사회학자 알렉산더 샤우스는 교도소 내부를 모두 분홍색으로 바꾸고 재소자들을 관찰하는 실험을 했다. 결과는 재소자들의 폭력성이 줄고 성격이 부드러워졌으며 사고 발생률이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샤우스 박사는 ‘분홍색 환경 속에 있는 사람은 공격적으로 행동하거나 화를 내기 힘들어진다’고 실험 결과를 설명했다. 색채의 치료 효과다. 진정작용과 근육이완 효과를 보이는 분홍색은 행동심리학자들의 치료요법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19세기 이전까지 핑크색은 남자의 색이었다. 1918년 미국의 여성 월간지 더 레이디스 홈 저널(The Ladies Home Journal)은 “핑크색이 강렬하기 때문에 남자아이에게 더 적합하다.”고 당시의 사회적 인식을 설명한 바 있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에는 왕위를 계승할 어린 왕자들에게 핑크색 드레스를 입혔으며, 당대의 귀족들에게는 부와 권위를 상징하는 전용색이기도 했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교회의 제단을 장식하거나 사제들의 제례복에 핑크색이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화가 이명기 작품인 허 목의 초상화를 보면 담홍색의 시복(時服)을 입고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 문신 채제공의 초상화에도 연분홍 의관을 입혀서 그렸다. 분홍색은 기품과 위상을 표현하는 남자들의 아름다운 색깔이었다.

<사진=김나래>

핑크색과 연결되는 심리학적 특징을 다름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 핑크색을 좋아하는 남자는 사람들에게 활력을 준다. 여성 이상으로 상냥하다.

* 여성은 애정이나 감정이 풍부하다.

* 열렬하고 강력하지만 감정으로 상처 받기 쉬운 여린 면이 있다.

* 미지의 매력이 있으며 본능적으로 남자를 남자로 만들어준다.

* 격무에 시달리고 숨 쉴 틈도 없는 사람들은 핑크의 우아함을 동경한다.

* 친구를 넓은 도량과 진심으로 다독거리며 이해심이 넓다.

* 하지만 당사자는 상처 받기 쉬운 타입이다.

* 책임감이 강하다.

* 타인들을 잘 격려한다.

* 여성에게 핑크는 연애, 모성애의 상징이다.

한 때 세계적인 미용 뷰티 앱 ‘YouCam 메이크업‘은 세계 여성들이 가장 선호하는 립스틱 색깔로 ‘밀레니얼 핑크’를 꼽았다. 어느 여가수의 ‘분홍 립스틱’이 떠오르면서 문득, 핑크컬러가 가을의 사인(sign)과도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푸른 가을 하늘은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 청량감에 몸도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우리는 색을 통해 심리적 영향을 받고, 색을 통해 필요한 에너지를 취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인생에서 삶과 예술에 의미를 주는 단 한 가지 색은 바로 사랑의 색이다‘. 샤갈의 말이 전율처럼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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