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의 삶에서 글쓰기를 배운다

손자가 그린 박지원 초상화 [사진출처=네이버 이미지]
손자가 그린 박지원 초상화 [사진출처=네이버 이미지]

[한국강사신문 김효석 칼럼니스트] 초기에 10여 년 동안 지속해서 거부당하는 고통을 견뎌내는 사람만이 세상을 바꾸어 놓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는 말이 있다. 미국의 경영 컨설턴트 톰 피터스는 흔히 하나의 명품 브랜드가 있기 까지는 최소한 10년 정도의 굴욕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굴욕의 기간을 이겨내느냐의 여부에 따라 명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연암 박지원은 35살에 과거시험을 접고 10여 년을 실학 공부에 매진했다. 이 기간이야말로 연암이 스스로 선택한 고난의 기간에 해당할 것이다. 결국, 그는 10년 후인 45살에〈열하일기〉를 세상에 내놓으며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었다. 연암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접해보면 자녀 교육비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직장생활을 하는 우리 시대의 평범한 가정의 모습과 중첩돼 더욱 더 애잔한 감정이 든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면 조선 영조 시대에 두 개의 별이 있었으니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이었다. 그때는 문화 문명이 꽃피웠던 르네상스 시대였다. 정조는 11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보고 성질이 난폭한 폭군으로 변할 수도 있었으나 억울함과 울분, 분통으로 부터 벗어나 4살 때부터 책 읽기를 통해 포용과 지혜를 얻어 성군으로 태어났다. 그 시대에 연암과 다산이 나온 것이다. 

연암은 과거를 볼 시기에 우울증, 거식증, 불면증에 시달린다. 그때부터 저잣거리에 나가 각각 다른 사람들과 만난다. 나이가 많은 노인도 3D업종에 종사하는 천민도 저잣거리의 불량배도 만난다. 주류 세계에서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과 소통하고 우정이 싹트고 친구가 된다. 그들로부터 보고 듣고 한 것을 작품집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출세를 위한 과거를 포기하고 자기만의 자유공간을 만들어 원초적인 자유 본능의 발현을 한 것이다. 시간이 남으니 파고다 근처에서 친구들과 모임을 갖고 지혜를 연마하는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계급,  신분, 생각, 상하좌우 할 것 없이 계파를 초월하여 모임을 만들어 우정과 지성의 공동체를 형성 친분을 유지한다. 또 중국 구천리를 여행하고 사물, 유적, 기후, 문명과 소통하면서 억눌렸던 감정이 폭발하여〈열하일기〉를 쓰게 된다. 단독 고전으로 최고 문장이라고 한다. 그는 중국말을 못 하니 필담으로 밤샘 소통하고 기록했다고 한다. 유머가 풍부하며 소통을 잘한 사람으로 통하였다. 

또한 박지원(1737-1805)은 조선 정조 때의 문장가. 실학자로 자는 중미(仲美)호는 연암(燕巖)으로 정조 4년(1780)에 진하사(進賀使)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열하일기〉를 저술하여 유쾌한 문장과 진보적 사상으로 이름을 떨쳤다.
북학론을 주장하였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을 강조하였다. 문집에〈연암집〉이 있다. 그는 이용(利用)이 있는 뒤에야 후생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후에야 정덕(正德)이 될 것이다. 그 소임을 이롭게(利用) 할 수 없는 대도 삶을 도답게(厚生) 할 수 없는 건 세상에 드물다. 또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면 어찌 덕을 바르게 펼(正德) 수 있겠는가?' 하는 부분이 일기 속에 있다. 이용과 후생 그리고 정덕이 바로 연암 문명론의 핵심일 것이다. 

청나라의 문물(文物)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고 자유로운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을 발표하여(허생전, 양반전) 당시의 양반계층의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이 또한 다산 정약용의 실사구시 실학사상과 맥이 같다고 하겠다. 여기서 열하일기가 나오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던 박지원은 우연히 청나라에서 들어온 책을 많이 읽고 청나라에 가서 서양문물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중 팔촌 형인 박명원이 청나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형님을 졸랐다. 

“형님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저는 아무런 벼슬이 없으니 무슨 일이든 시켜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마부로라도 청나라에 따라가고 싶습니다.” 

열하일기 [사진출처=북드라망]
열하일기 [사진출처=북드라망]

간곡한 부탁에 형은 박지원을 졸개 군사로 삼아 청나라에 가는 사람 중에 가장 낮은 지위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지원은 낮은 지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나라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청나라에 도착한 박지원은 그곳에서 보고 느낀 것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이 스물여섯 편의 일기가 바로〈열하일기〉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 속에 청나라에서 배운 농부들의 새로운 농사법, 세계 여러 나라의 소식과 편리한 기계들에 관해서도 썼다. 이 일기의 이름이 틈새인 것은 틈새라는 곳에서 있었던 일기이기 때문이다. 틈새에서 박지원은 중국의 이름난 학자 왕만호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박지원이 쓴 글을 보고 크게 놀라 박지원을 중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로 인해 박지원의 이름은 청나라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박지원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가 놀랐다. 조선에서 박지원은 이름 없는 한 선비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도 그럴 것이 박지원은 장가를 가고 나서도 글을 읽을 줄 모를 정도로 무식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이름 없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몸이 약해 일찍 죽자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노는 것 밖에 몰랐다. 열여섯 살이 되었어도 글을 몰랐다. 그러다가 장가를 간 박지원은 내가 자주 이것저것 물어보자 자신이 무식하다는 것을 깨닫고 공부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3년이 지나자 그는 그 마을에서 글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처음에는 무식한 사람이었지만 학문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박지원은 늙어서까지 항상 공부하는 자세를 가졌다.  

따라서 연암의 일생은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35세까지로 과거시험을 그만둘 때까지 학문에 발을 들여넣어 놓고 과거를 보려고 했던 입문기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가 공부를 시작한 것은 16살 때 전주이씨와 결혼하면서 부터라는 것이다. 2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연암은 가난한 형편으로 어린 시절에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연암이 글 공부를 제대로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장인 이보천이 직접〈맹자〉를, 이보천의 동생인 홍문관 교리 이양천은 사마천의 사기를 가르쳤다. 이 때 읽은〈사기〉는 연암의 삶과 저술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연암을 키운 것은 역설적으로 가난이었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실학의 대가인 연암이었지만 정작 자신은 가난으로 곤궁함을 면치 못했다. 젊은 시절 과거시험을 보기도 했던 연암은 부패하고 권력 놀음에 빠진 조정에 실망한 나머지 35살에 과거시험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 

그 후 연암인생의 제2기가 펼쳐지는데 35세에서 50세 벼슬살이할 때까지 실학자들과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던 탐구기다. 이때부터 그는 실학자로서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 나갔다. 늘 가난한 살림살이로 부인 전주이씨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제3기는 50세부터 세상을 떠난 69세까지 자신의 이상을 벼슬살 이로 이루어보려고 한 실천기라고 할 수 있다. 

연암이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른 것은 무려 50세 때였다. 당시 연 암은 당대의 베스트셀러인〈열하일기〉의 작자이자 북학파의 거두였지만 늘 가난을 면치 못했다. 결국 그는 고생하는 부인을 위해 50세에 남들의 비웃음을 살 정도인 내관 관직을 받아들인다. 쉰의 나이에 건축 담당 하급 관리인 선공감 검역(종9품)으로 벼슬길에 오른 것이다.  당시 홍대용, 박제가등 당대의 실학파들과 연암파를 형성할 정도의 대학자가 요즘의 국토교통부의  9급 공무원에 임명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말로 대학자 연암으로서는 엄청난 굴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반년도 못돼 부인은 세상을 떠나고 만다. 또 주위에선 나이가 늦었다며 인사승진을 위해 청탁을 하라고 권고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이를 사양했다. 쉰 살에 종9품 최하위직에서 시작한 연암은 그 늦은 나이에도 종3품까지 이르렀다. 연암은 자신이 가난으로 어린 시절 공부를 하지 못해서인지 두 아들 교육에 소홀하지 않았다. 그는 과거시험을 앞둔 아들을 챙기며 이런 편지를 보냈다. 

‘과거시험 볼 기일이 점차 가까워진다. 지은 것이 몇 수나 되느냐? 또 빨리 지었는데 어려움은 없는 게냐? 제 목을 보고 생각에 어려움이 없는 상태에서 시험장에 들어가면 비록 반을 덜어 내더라도 능히 답안지를 제출 할 수 있을 것이다. 돈 닷 냥을 보내니 시험 답안을 쓸 종이와 과거시험 볼 때 소용되는 물건을 마련하면 좋겠구나.’ 

또한 안의 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책을 소홀히 다루는 아들에게’ 라는 제목의 편지를 보내어 책 읽기를 강조했다. 내가 4년간〈강목〉을 열심히 읽어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 세 번 되풀이해서 읽었어도 늙고 보니 책만 덮으면 문득 잊어버리고 만다. 연암의 독서법은 끌리는 책을 반복해서 읽으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개성적인 독서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선시대 학자들의 필독서였던〈사서삼경〉보다 선비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역사서나 소설들을 즐겨 읽었다. 특히 연암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책은〈사기〉로 여기에서 강렬한 현실비판 의식과 인간 중심 사상을 배웠다. 또 그는 책을 읽는 도중에 느낌이나 새로운 생각들을 옆에 적어놓거나 기록해 두면서 나중에 한권의 책을 만들었다. 연암이 쓴〈공작관고(孔省館稿)〉는 그가 읽은 책을 발췌한 책이다. 그가 즐겨 읽었던 김성탄의〈서상기〉에 대한 비평과 문학비평을 발췌해 모은 것이다.  이러한 독서법을 자녀들에게도 자세히 알려주면서 살뜰히 자녀들을 챙겼다한다. 그는 아들에게 고추장을 작은 단지로 하나 보낸다. 

“사랑에 놓아두고 밥을 먹을 때 마다 먹으면 좋겠다. 이것은 내가 손수 담근 것인데 아직 잘 익지 않았다.”

 이 글에서 엄하면서도 자상한 아버지 박지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박지원에게 배울 수 있는 또 하나는 메모습관이다. 1780년 비가 주룩주룩 오는 여름철 44살인 박지원은 중국 베이징에서 3개월 동안 겪은 모든 여정과 느낌을 메모했다. 이게 바로 〈열하일기〉다. 오늘날과 달리 필기도구조차 변변치 못한 시절에 메모를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치밀하고 철저한 메모로 쓴 〈열하일기〉는 100여종이 넘는 중국 여행기를 제치고 당대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읽혀지고 있는 스테디셀러이다. 그 까닭은〈열하일기〉가 바로 치밀한 메모를 바탕으로 쓴 글이기 때문이다.

연암이 쓴 글은 누구보다 솔직하다. 솔직하다는 것은 보고 느낀 바를 그대로 썼고 여기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이게 바로 진실의 기록이다. 진실을 이길 수 있는 무기는 결코 없다. 그런데 그 진실은 바로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는 메모에서 나온다.

요즘 독서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아이가 책을 읽지 않는다고 조급해하는 부모들을 많이 본다. 연암도 16살에 뒤늦게 공부하고도 조선 최고의 문장가가 되었다.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중에 라도 책을 가까이하고 또 연암처럼 책을 모방해 글짓기를 해본다면 우리시대 최고의 문장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메모 습관을 갖게 한다면 그 또한 연암처럼 위대한 글쓰기의 시작일 것이다. 

열하일기를 읽는다는 것은 한국인으로 산다는 행운과 행복감을 느낄 것이다. 열하일기는 철학적의미가 있어 금방 이해는 못할지라도 연구할만한 생각이 날 것이다. 그의 삶에서 자유분방한 사고, 계파를 초월한 우정과 지성의 공동체 형성,유머를 통한 소통방식은 지금 우리사회에도 꼭 필요한 덕목일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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