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 캔버스 유채, 130.5*190cm, 오르세 미술관]
[사진출처 =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 캔버스 유채, 130.5*190cm, 오르세 미술관]

[한국강사신문 정인호 칼럼니스트] “여러분은 어떤 영화를 즐겨보십니까?” 이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품성 있는 영화 제목을 줄줄 말하지만 정말 즐기는 건 따로 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실제 행동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예컨데 서랍 깊숙이 USB를 숨겨 놓거나,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보안 폴드에 암호까지 걸어 감춰 놓고는 혼자만 즐긴다. 이런 영화를 뚫어지라고 반복해 감상하면서 입가에 미소를 짓지만, 정작 공개적으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야한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처럼 뻔한 스토리의 막장 드라마를 열심히 보거나 야한 영화를 즐기는 모습은 일종의 ‘길티 플래져(guilty pleasure)’라고 할 수 있다. ‘길티 플레져’는 '길티(guilty·죄책감이 드는)'와 '플레저(pleasure·즐거움)'가 합쳐진 말로, 어떤 일을 할 때 죄책감·죄의식을 느끼지만, 또 동시에 엄청난 쾌락을 만끽하는 심리를 말한다.

사회적인 통념 때문에 주변인들에게 떳떳하게 밝히지는 못하고 본인 역시 그러한 시선을 무시할 정도로 자신의 취미나 기회에 자신감을 갖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떨쳐 버릴 수 없는 즐거움과 매력이 있기 때문에 지속하게 되는 행동들이 바로 ‘길티 플레져’인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길티 플레져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현진건의 단편소설인 《B사감과 러브레터》에서 B사감이 겉으로 보기에 도도하고 엄격하지만 사실은 학생들에게 온 러브레터를 읽으면서 마치 자신에게 온 것인양 연기를 하는 것도 길티 플래져라 할 수 있다.

미술 쪽으로 눈을 돌리면,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1865)》가 대표적이다. 완전히 옷을 벗은 채 침대에 누워있는 여인을 모델로 한 그림이 파리의 살롱 드 레뷔제에 공개되자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관람객들의 비난이 쇄도했다. 노골적인 자세와 대담한 눈빛, 당당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이 여인에게서 수줍음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그림 속 여인이 매춘부로 알려지면서 비난의 반응은 분노와 역겨움으로 바뀌었다. 임산부들은 보지 말아야 한다는 신문기사들도 실렸고 소심한 파리 남자들은 한번도 그런데는 가보지도 않는 것처럼 어떻게 저런 여성을 그릴 수 있느냐 비난했다. 그러나 비난을 핑계로 이 그림 앞은 늘 인산인해였고, 임산부는 보지 말라고 기사를 썼던 신문기자들조차 매일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인간의 심리적 왜곡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무언의 압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도덕성이나 사회적 윤리, 가치관 등이 그런 것이다.

결국 길티 플레져는 타인이 기대하는 내 모습과 나의 기호가 충돌하는 현상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타인의 시선에 더욱 민감한 집단주의 문화권인 동양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어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것(should)을 하기 위해 하고 싶은 것(want)을 포기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만약 ‘해야 하는 것’ 대신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한다면 주변으로부터의 비난을 면치 못할뿐더러, 철이 덜 들었다느니 정신을 못차린다는 평가까지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평가와 주변의 반응이 싫은 사람들은 겉과는 다른 속을 가지기도 한다.

다들 웰빙을 외치고 있고 본인 역시 그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스턴트 식품을 멀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밤마다 MSG 가득한 라면을 원하고, 명품 세일에 몰리는 인파를 보며 혀를 차면서도, 친구가 멋진 명품을 걸치고 나오면 은근히 기가 죽는 이중적인 우리의 모습 속에서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만약 당신의 길티 플레져가 사람을 죽이면서 얻는 쾌락 때문에 살인을 멈출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면, 적절한 수준에서 즐길 필요가 있다. 행복, 그거 별거 아니다. 체면 차리느라 외면하고 싶었던 욕망을 즐길 줄 아는 이들이 행복한 인간이 아닐까. 즐겨 보라. 당신의 길티 플레져를!

칼럼니스트 프로필

정인호 칼럼니스트는 경영학 박사이자 경영평론가, 협상전문가로서 현재 GGL리더십그룹 대표로 있으며, 《한국경제》, 《헤럴드경제》, 《브릿지경제》, 《이코노믹리뷰》, 《KSAM》 등의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국내외 기업을 대상으로 매년 200회 강연을 하고 있으며, 스타트기업 사내외 이사 및 스타트업 전문 멘토로도 활동하고 있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인호의 강토꼴’을 8년째 재능 기부로 운영하고 있으며, 유튜브 《아방그로》 채널을 통해 경영, 리더십, 협상, 예술, 행동심리학 등 통찰력 있는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저서로는 《서울대 필독서 40》,《부자의 서재에는 반드시 심리학 책이 놓여 있다》,《다시 쓰는 경영학》, 《아티스트 인사이트》, 《언택트 심리학》, 《화가의 통찰법》, 《호모 에고이스트》, 《갑을 이기는 을의 협상법》, 《가까운 날들의 사회학》, 《다음은 없다》, 《소크라테스와 협상하라》, 《당신도 몰랐던 행동심리학》, 《협상의 심리학》, 《HRD 컨설팅 인사이트》 등 다수가 있다.

관련기사

주요기사
저작권자 © 한국강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