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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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강사신문 김은아 칼럼니스트] 평소 명랑한 지인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민을 토로했다. 결혼하고 싶은 이가 있는데, 남자의 부모가 자신을 탐탁히 여기지 않는다고. 이유는 학력이었다. 연인의 아버지는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선교사였다. 전 세계를 다니며 ‘서로 사랑하라’라는 신의 복음을 설파하면서도, ‘고졸은 안 된다’라는 입장이었다. 지인은 그건 표리부동이라며 누가 구겨버린 것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몇 년 동안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이려 애썼지만, 그는 바위처럼 변동이 없었다. 자식을 독립적 인격체로 여기지 않는 가부장 정서와 사회적 체면을 따지는 기성 관념은 아들을 옭아매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지인의 물음에 자기 비하에 빠지지 않고, 자존하자고 다독였다.

기성 관념의 견고한 지배를 뚫고 나온 새순 같은 사랑. 그 고통을 감내하는 연인의 용기가 내게는 멸종위기에 놓인 희귀종처럼 귀진하게 느껴졌다. 사랑의 무계급성과 용기, 과감함은 더는 현실에서는 드물고, 타이타닉이나 노트북처럼 시대의 유물 같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으므로.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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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타닉에서 로즈는 사회 관습에 갇혀 자신을 잃어가는 귀족 여성이다. 로즈의 자살 시도를 우연히 목격한 하층민 노동자 잭은 그녀를 구하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사랑의 서사 속에서 순항하던 배는 빙하에 충돌해 가라앉지만, 그들의 사랑은 침몰하지 않는다. 망망대해 위에 실존함으로써 로즈를 지킨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세월이 흘러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노인이 된 로즈. 그녀의 백발과 주름진 얼굴을 클로즈업하면서 영화는 전한다. 한 사람을 재난처럼 관통한 사랑은 그를 구한다고, 삶을 살아내고 지켜낼 수 있도록 변화시킨다고.

사랑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이 우연히 가까워지면서 서로에게 스며드는 것이 사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로의 세계를 허물지는 않으나 ‘나’와 타자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그렇게 상대방의 일부가 되어가고 변화하는 과정 어딘가에 사랑이 있다.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사랑을 꺼리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삶의 청정 보호구역인 사랑에도 자본주의가 침투하면서 사랑은 오염되었다. 얼마 전이었다.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는데 네온사인처럼 번쩍이는 글씨가 우연히 눈에 띄었다. ‘연봉 사천만 원, 네 살 연하’ 이삼십 대 대상 온라인 소개팅 앱의 광고  문구였다. 어느 정도 선의 경제적 안위와 젊음이 보장된 만남이라. 상품 태그 같은 뉘앙스에 쓴웃음이 났다.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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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쇼핑하듯 만남을 구매하고, 사랑이 성욕으로 변질한 시대. 성과 위주의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경영하려 든다. 자신의 손실과 상처를 최소화하려는 자아중심적 사고 속에서 타자는 소멸하고, 자아는 외롭고 비대해진다.

외롭고 비대한 자아만 가득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할수록 기형적 인간이 도시를 부수고, 사람을 해치는 빌런 영화가 그려져 팔뚝에 소름이 쭈뼛쭈뼛 선다. 증가하는 데이트 폭력과 이별에 대한 보복성 범죄, 가족 난투극. 텔레비전 뉴스를 시청하면서 동공이 확장되고, 맥박이 빨라지는 일이 빈번해지지 않았나. 바다 오염으로 등이 굽은 물고기가 쏟아지듯, 변질한 사랑은 관계를 죽이고 인간을 욕구의 포식자로 기형화한다.

‘사랑’이라는 무형의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긴다.’ 나는 이 뜻을 다음과 같은 유형의 태도로 이해했다. 눈을 가까이 맞추거나 목소리를 듣는 것, 안부를 묻고 손을 잡는 것, 시간을 내어 그의 처지를 느긋하게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이러한 일상에서 우리가 연결될 때, 사랑은 분명히 그 자리에 실존한다. 

칼럼니스트 프로필

동국대학교에서 영어 영문학을, 영국 위틀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플로리스트학을 전공했다. 인생에는 정해진 답이 없고 스스로 묻고 물어 맞는 길을 찾아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여기는 감성적 모험주의자이다.

문학과 꽃을 이용한 힐링 강의를 하며, 한경대학교 신문사 주최, 한경문학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요즘 세대의 마음을 담은 꽃말 에세이 <모든 순간에 꽃은 피듯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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