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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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강사신문 유영만 칼럼니스트] 초점식과 보조식은 질환(disease)과 질병(illness)의 차이에 상응합니다. 질환은 ‘치료(curing)’의 대상이자 초점식이며 명시적 지식으로 표현이 가능합니다. 질병은 치유 또는 ‘보살핌(caring)’의 대상이자 보조식이며 암묵적 지식의 영역입니다.

“질병은 질환을 앓으면서 살아가는 경험이다. 질환 이야기가 몸을 측정한다면, 질병 이야기는 고장 나고 있는 몸 안에서 느끼는 공포와 절망을 말한다. 질병은 의학이 멈추는 지점에서,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 단순히 측정값들의 집합이 아님을 인식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내 몸에 일어나는 일은 내 삶에도 일어난다. 내 삶에는 체온과 순환도 있지만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도 있으며, 이런 것들은 측정될 수 없다. 질병 이야기에 그 몸 같은 것은 없으며 오직 내가 경험하는 내 몸만이 있다.<아서 프랭크, 『아픈 몸을 살다』>

체온은 명시적 지식이지만 체온으로 느끼는 낙담과 기쁨, 그리고 슬픔은 모두 감정 언어로 번역해낼 수 없는 암묵적 영역입니다. 어떤 사람의 혈압 수치가 140에 90이라서 고혈압이라고 진단할 때, 고혈압은 질환인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두려움이나 불편함, 불안감 같은 심리적 문제는 질병입니다. 질환은 환자가 지금 당장 초점을 두는 초점식이라서 명시적 언어, 즉 수치로 표현이 가능한 데 반해 질병은 환자가 질환을 보고 느끼는 다양한 심리적 감정의 변주가 보조식으로 관여할 뿐입니다.

혈압을 떨어뜨리기 위해 고혈압 약을 처방하는 의사의 진료는 치료에 해당하지만 고혈압으로 겪는 심리적 불안감과 두려움을 보살펴주는 의사의 진료는 치유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증상과 질환을 일으킨 원인에 대한 치료는 초점식이고 명시적 영역입니다. 대부분의 의사가 진료 대상으로 삼는 부분이죠. 하지만 환자가 진짜 원하는 것은 초점식으로 드러난 객관적 수치가 아니라 그 수치가 환자에게 미치는 불안감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해소하고 질환을 받아들여 이겨내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북돋아주는 치유에 있습니다.

알프스산맥의 뚜르드 몽블랑에 트레킹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중등산화를 신고 갔습니다. 발목 위 복숭아뼈까지 덮어 발목을 보호하는 등산화가 중등산화입니다. 그런데 발목을 보호하는 내피가 복숭아뼈를 계속 자극해서 물집이 생겼습니다. 언덕을 오를 때는 큰 통증이 없는데, 내리막길에서는 똑바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옆으로 몸을 틀어서 한 발 한 발 디뎌야 할 정도였지요.

이런 저의 사정도 모르고 가이드는 시간이 촉박한데 왜 빨리 내려오지 않느냐고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이때 옆에서 저를 계속 봐왔던 동료가 뜻밖의 제안을 합니다. 신발을 바꿔 신자고 말입니다. 동료의 신발은 부드러운 헝겊 소재로 만들어서 제 신발보다 훨씬 덜 자극적이었습니다.

최고의 벗은 상대의 아픔을 가슴으로 생각하며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발 벗’이야말로 최고의 벗입니다. 살피지 않으면 보살필 수 없습니다. ‘살핀다’는 것은 그 사람이 품고 있는 말 못할 아픔을 계속 관찰하는 애정과 관심의 표현입니다. 상대가 겪는 아픔을 상상으로나마 경험해보고 어떤 조치를 취하면 저 아픔이 치유될 수 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으면 이런 보살핌의 행위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보살핌은 초점식으로 드러나지 않고 명시적 지식으로 표현할 수 없는 상대방에 대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끊임없이 계속 살펴본 다음에 온 마음을 동원해 상대방의 마음을 어루만질 때, 언어화시킬 수 없는 엄청난 암묵적 지식이 탄생합니다.

※ 참고자료 : 『아이러니스트: 내 맘 같지 않은 세상에서 나를 지키며 사는 법(EBS BOOKS, 2021)』

칼럼니스트 프로필/ 작품활동

유영만 칼럼니스트는 지식생태학자이자 한양대학교 교수로 활동 중이다. 유 교수는 한양대학교 대학원 교육공학 석사, 플로리다주립대학교 대학원 교육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삶으로 앎을 만드는 과정에서 철학자의 주장보다 문제의식이 주는 긴장감에 전율하는 경험을 사랑한다. 오늘도 삶의 철학자로 거듭나기 위해 일상에서 비상하는 상상력을 배우며 격전의 현장에서 현실을 매개로 진실을 캐내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아이러니스트』 『부자의 1원칙, 몸에 투자하라』 『책 쓰기는 애쓰기다』 『유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유영만의 파란 문장 엽서집』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 『한 줄의 글이 위로가 된다면』 『독서의 발견』 『지식생태학』 『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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