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으로 지시하지 말고 지혜로 지휘하는 방법

[한국강사신문 유영만 칼럼니스트] 실천적 지혜가 탄생하는 순간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난해한 질문을 맞닥뜨렸을 때 잘 발현됩니다. 코닥이라는 회사에 유치원생들이 견학을 간 적이 있습니다. 코닥은 필름을 만드는 회사로 유명하잖아요. 그런데 견학을 온 유치원생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필름이 뭐예요?” 코닥의 전문 기술자는 그동안 수없이 해온 준비된 설명을 하지요. “필름이란 빛에 노출되면 이미지를 형상화하기 위해서 화학 반응하는 물질”이라고 말이죠. 유치원생이 알아들을 리가 없죠. 전문 기술자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해야 아이들에게 필름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 고민 끝에 다시 설명하죠.

“필름은 그릇이야! 세상의 모든 이미지를 다 담을 수 있으니까.” 그랬더니 아이들이 알아듣는 거예요. 내가 아는 것을 누군가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순간에 번뜩이는 지혜가 생기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지혜란 도덕적 자발성과 도덕적 스킬의 조합”이라고 했습니다. 실천적 지혜는 단순한 사실관계나 법률과 규칙이나 원칙, 직무 기술을 아는 것만으로는 생기지 않습니다. 서로 갈등하는 몇 가지 선의의 목표를 조율하거나 어느 하나를 골라야 하는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기술이 필요합니다. 상황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절차와 규율만 고수하는 전문가가 많을수록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경우도 많아집니다.

배리 슈워츠와 케니스 샤프가 쓴 『어떻게 일에서 만족을 얻는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아버지가 레모네이드를 사달라고 조르는 아들에게 가게에서 마이크스 하드 레모네이드(Mike’s Hard Lemonade)를 무의식적으로 사주었습니다. 가게에 있는 레모네이드라고는 그거 하나뿐이었습니다. 이 레모네이드가 알코올 도수 5도인 제품인 줄도 모르고 레모네이드라는 글씨만 믿고 아들에게 사준 것입니다.

때마침 경비원이 레모네이드를 홀짝이던 아들을 발견하고 경찰에게 신고합니다. 경찰은 구급차를 불러 급히 아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지만 의사들은 아들에게서 알코올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아들을 퇴원시킵니다. 하지만 경찰은 아들을 집으로 보내지 않고 아동보호소의 위탁 가정에 맡깁니다. 아들은 원하지 않았지만 절차에 따라야 했습니다.

위탁 가정에서 3일 동안 머문 뒤 아들은 엄마가 있는 집으로 가도 좋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다만, 아버지는 집을 떠나 2주 동안 호텔에 머물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죠. 판사도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주정부의 법률적 절차에 따라야 했습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런 음료수를 정기적으로 주거나 아이가 알코올을 남용해도 눈감는 아버지와 동일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상황에 따른 도덕적 판단과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지 않고 그냥 관례대로 규율과 절차에 따라 법집행을 감행한 판사의 고지식함이 불러온 어처구니없는 사례입니다. 판사는 판결을 내리기 전에 몇 가지 질문을 던져놓고 심사숙고했어야 합니다.

매점 주인은 과연 알코올 도수가 5도짜리인 레모네이드를 아이가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팔았을까, 아버지는 레모네이드에 알코올이 함유된 것을 알고도 아이에게 주었을까, 아이는 알코올이 포함된 걸 알고도 마셨을까? 판사는 당사자들의 판단과 행동 조건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과거의 판례만을 근거로 삼은 것이지요.

원칙은 소중합니다. 하지만 질문과 판단이 실종된 원칙의 적용은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명문화된 규율 역시도 그것을 적용할 때는 맥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원칙은 또 다른 원칙과 갈등해야 하고 그러면서 조율되어야 합니다. 엄격한 규율과 교조적인 원칙이 상황 판단과 조율에 필요한 실천적 지혜를 주변으로 몰아낸다면, 훌륭한 판단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칼럼니스트 프로필/ 작품활동

유영만 칼럼니스트는 지식생태학자이자 한양대학교 교수로 활동 중이다. 유 교수는 한양대학교 대학원 교육공학 석사, 플로리다주립대학교 대학원 교육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삶으로 앎을 만드는 과정에서 철학자의 주장보다 문제의식이 주는 긴장감에 전율하는 경험을 사랑한다. 오늘도 삶의 철학자로 거듭나기 위해 일상에서 비상하는 상상력을 배우며 격전의 현장에서 현실을 매개로 진실을 캐내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아이러니스트』 『부자의 1원칙, 몸에 투자하라』 『책 쓰기는 애쓰기다』 『유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유영만의 파란 문장 엽서집』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 『한 줄의 글이 위로가 된다면』 『독서의 발견』 『지식생태학』 『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 외 다수가 있다.

※ 참고자료 : 『아이러니스트: 내 맘 같지 않은 세상에서 나를 지키며 사는 법(EBS BOOKS,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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